2024년 3월 17일 일요일

건안칠자建安七子 - 중국 후한 건안 때 시문에 뛰어났던 칠인의 문학가

건안칠자建安七子 - 중국 후한 건안 때 시문에 뛰어났던 칠인의 문학가

건안칠자(建安七子) - 중국 후한 건안 때 시문에 뛰어났던 칠인의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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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울 건(廴/6) 편안 안(宀/3) 일곱 칠(一/1) 아들 자(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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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安(건안)이라 하면 중국 後漢(후한)의 마지막 14대 獻帝(헌제)의 연호다. 이 때의 왕실은 명맥만 유지한 채 魏蜀吳(위촉오)의 三國(삼국)이 할거했던 시기다.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曹操(조조)는 아들 위나라 초대 왕이 되는 曹丕(조비)와 曹植(조식)과 함께 문학에도 재주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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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이 망하는 서기 220년 전후에 조조 삼부자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대거 모여들어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뛰어난 7명의 재사를 가리켜 建安七子(건안칠자), 또는 위 세력의 중심지였던 河北省(하북성)의 도시 鄴(업)의 이름을 따 鄴下七子(업하칠자)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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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孔融(공융), 陳琳(진림), 王粲(왕찬), 阮瑀(완우), 劉楨(유정), 徐幹(서간), 應瑒(응창, 瑒은 옥잔 창) 등 7인이다. 한나라 때 유행했던 賦(부) 대신 詩(시), 특히 오언시의 발전에 공헌했고, 종래의 유가적 취향을 벗어나 청신한 격조를 불러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 7명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문학이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후원자인 조비가 두 편의 글에서 높이 평가한 덕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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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문학을 建安體(건안체), 建安風骨(건안풍골)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南宋(남송) 때의 魏慶之(위경지)란 시인이 쓴 시화집 ‘詩人玉屑(시인옥설)’에 잘 표현돼 있다. 屑은 가루 설. ‘건안체는 한나라 말기의 연호인데 조자건 부자와 업도에서 활동하던 일곱 시인의 시를 말한다(建安體 漢末年號 曹子建父子及鄴中七子之詩/ 건안체 한말연호 조자건부자급업중칠자지시).’ 여기서 子建(자건)은 조식의 자인데 형 조비의 트집으로 煮豆燃萁(자두연기, 萁는 콩대 기)라는 七步詩(칠보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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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 중에서 다른 곳에서도 이름을 남긴 몇 사람을 살펴보자. 공융은 孔子(공자)의 20대 직계 후손으로 재능에 자부심이 크고 강직하여 조조의 면전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예사로 하다 죽음을 당했다. 왕찬은 당대의 석학 蔡邕(채옹)이 재능을 인정했고 부와 산문의 명수였다. 진림은 조조를 비방한 명문으로 조조의 속을 썩이다 뒤늦게 투항했다. 유정은 엄격한 풍격의 오언시로 문명을 높였고, 완우는 竹林七賢(죽림칠현)중의 한 사람인 阮籍(완적)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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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 어지러운 때에 문학에 힘을 쏟았고, 또 온갖 술수를 부려 평가를 받지 못하는 조조 부자가 문인들을 후원했다는 것은 의외다. 공포정치를 휘두르며 문학을 탄압하려 해도 사람의 머릿속까지 통제할 수는 물론 없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