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화요일

조선의 우체부, 전인專人

■ 조선의 우체부, 전인專人

■ 조선의 우체부, 전인(專人)

요즘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이라도 전화나 문자 등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편지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 편지는 주로 인편(人便)으로 전해졌다. 인편을 구하기 마땅치가 않으면 편지를 써두고 기다렸다가 일정과 행선지가 맞는 사람을 찾으면 밀린 편지를 한꺼번에 써서 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품삯을 받고 편지를 배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전문배달꾼이 생겨났다. 요즘으로 말하면 ‘우편배달부’ 이다. 이들은 전인(專人) 전족(專足) 등으로 불렸다.

전인은 주소가 없던 시대에 사는 곳과 이름만 듣고 편지를 전달해야했기 때문에 수취인(受取人)이 사는 곳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야 했다. 물어물어 수취인을 찾아야 하니 길눈도 밝아야 하고, 먼 길을 일정에 맞춰 다닐 수 있는 빠른 발걸음과 체력도 필요했다. 이렇듯 전인은 그 나름대로의 전문성이 필요했다. 노잣돈과 품삯은 일정과 거리에 따라 정해졌다. 먼 거리를 급하게 갈 전인의 품삯은 결코 적지 않았다.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가 방자를 불러 “10냥을 주고 솜옷도 한 벌 해줄 테니 이몽룡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방자를 전인으로 쓰겠다는 말이다. 조선후기 서울의 노동자 하루 품삯이 25푼 남짓이었으니, 춘향이는 40일 치 임금과 옷 한 벌을 품삯으로 제시한 셈이다.

하지만, 원하는 지역을 원하는 일정에 갈 수 있는 전인을 딱 맞게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인을 주선해주는 중개인도 있었는데, 중개인 없이 전인을 직접 구하면 흥정이 쉽지 않았다. 전인이 높은 가격을 부르면 고리(高利)로 빚을 내기도 했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비용 일부를 수신자(受信者)에게 착불로 부담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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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인은 궁궐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가에서 전인이 활약했다면 궁궐 식구들이 궁 밖의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는 글월비자(婢子) 가 맡아서 전달했다. 비자(婢子)는 궁궐에서 색장나인(色掌內人:궁녀) 밑에서 심부름을 맡아서 하는 여자를 부르는 말인데, ‘글월을 전하는 심부름을 맡아서 하는 비자(婢子)’라는 뜻에서 ‘글월비자’ 라고 불렸다. 여러 곳에 문안편지를 전달하고 그 답장을 받아오는 것이 이들의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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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월비자는 대개 나인내인(內人)으로도 뽑히지 못하는 가난한 천민의 딸들로, 우중충한 검은 빛이 도는 색으로 물들인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검은 띠를 매어 글월비자임을 표시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들 정조를 두고 『노모 마음을 헤아려 서울 성내 거동이라도 궁을 떠나시면 안부를 묻는 편지가 끊이질 않으시더라.”라고 썼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수시로 보낸 편지도 아마 글월비자가 전달했을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