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2일 금요일

두문동을 아십니까?

■ 두문동을 아십니까?

■ 두문동을 아십니까?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는 말이 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일체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 있었던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임신년(1392)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가들과 고려 왕족 중에서 조선의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아 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을 그 지역 사람들은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는데, 두문동은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

『개성지』에 의하면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고려의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과거시험을 열고 고려 유신들을 등용하려 하였으나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대신 초립을 푹 눌러쓰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서두문동에서는 72인의 선비가, 동두문동에서는 48명의 무인이 자리를 잡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마을 입구에 사립문을 설치하였는데 그 문은 항상 닫혀있었고, 문 옆에 가죽 채찍을 하나 걸어두었다. 과거를 보려는 자는 채찍을 맞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

이성계는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자,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만약 그들이 불을 피해 밖으로 뛰쳐나오면 조선의 관리로 벼슬을 주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문동 선비들은 단 한명도 뛰쳐나오지 않고 모조리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해지며, 여기에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현재 마을에는 조의생, 임선미를 비롯한 72명의 고려 유신들의 절개를 찬양한 두문동비가 세워져 있다.

",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두문동 72현과 정몽주의 선죽교 살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 영조 때 만들어졌고, 이후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하지만, 고려 왕조가 망하면서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72인 중에는 이미 그 전에 죽은 자도 여럿 있었고, 조선 조정에서 벼슬을 한 사람도 여러 명 있는 것으로 보아 두문동 전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부분 각색된 듯하다.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