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즉전의疑則傳疑 - 의심나는 부분은 그대로 전한다.
의즉전의(疑則傳疑) - 의심나는 부분은 그대로 전한다.
의심할 의(疋/9) 법칙 칙, 곧 즉(刂/7) 전할 전(亻/11) 의심할 의(疋/9)
의심스러운 것(疑則)은 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한다(傳疑)는 이 말은 사서의 서술 원칙으로 지켜져 왔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과거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또는 독단으로 하다가는 후세에 뒤집힐 수 있으니 판단을 미루는 방법이다. 司馬遷(사마천)이 동양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史記(사기)’를 쓸 때 지켰던 원칙이기도 하다. 많이 알려졌듯이 사기는 사마천의 피땀의 기록이다.
중국 前漢(전한)의 武帝(무제)때 역사가로 기원전 145년께 나서 59세에 이르는 생애를 이 책과 따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친 司馬談(사마담)이 천문 역법과 도서를 담당하는 太史令(태사령)으로 있을 때 미완의 사서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지키려 혼신을 다했다.
사마천은 이후 郎中(낭중)이 되어 황제를 수행하면서 자료를 모았고, 태사령으로 근무할 때 황실 도서관에서 자료에 파묻혔다. 40대 때인 기원전 99년 최대의 시련이 닥쳤다. 당시 흉노에 항복한 李陵(이릉) 장군의 가족까지 처벌받자 부당하다고 변호한 사마천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를 잘리는 宮刑(궁형)을 당했다.
치욕을 딛고 옥중에서도 저술을 이어간 그는 마침내 13년여에 걸친 사서를 완성했다. 처음 ‘太史公書(태사공서)’로 탄생한 이 책은 제왕의 연대기인 本紀(본기)부터 뛰어난 인물들의 列傳(열전)까지 130편에 52만 6000여 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魏晋(위진)시대부터 사기로 칭해진 이 책은 독특한 역사체계 紀傳體(기전체)로 이후 모든 정사의 표준이 됐다. 이 책의 특색은 그것만이 아니다. 각 편마다 太史公曰(태사공왈)이라며 예리한 사안으로 독특한 비판을 가해 중국 역사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였다. 거기에 앞부분에 말한 의심스런 부분을 그대로 전해 판단을 유보한 원칙이다. 三代世表(삼대세표)의 서문에 연월이 없어진 부분이 많다며 이어진다.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이 나는 대로 전하였으니 그것이 신중할 것이다(疑則傳疑 蓋其愼也/ 의즉전의 개기신야).’
사마천의 사기는 오늘날 사용되는 고사성어의 25%가 여기서 유래했다고 할 정도로 두고두고 읽혔다. 기원전 91년께 초고가 완성됐다고 하니 2000년이 넘게 이어오면서 최고의 사서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니는 것은 문장이 유려한데다 의심스런 부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은데도 있을 것이다. 한 분야의 권위자가 자기만 아는 원칙을 고집하다 뒤에 부작용이 드러나는데도 굽히지 않는 것을 종종 본다. 역사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사기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 / 글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