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7일 수요일

천생연분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

■ 천생연분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

■ 천생연분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비로, 이성계의 둘째 아들 영안군 이방과가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되었고, 후에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덕비(德妃)로 진봉(進封)되었다. 정종은 원래 왕이 될 생각도 욕심도 없었지만, 야망에 가득한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와 세자 방석이 죽게 되자 얼떨결에 세자가 되었고, 곧이어 태조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방원의 야심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바늘방석 같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이 불안한 바늘방석 같은 왕위를 이방원에게 흔쾌히 넘겨주게 된 것은 정안왕후 김씨의 조언 덕분이었다.

정종과 정안왕후는 왕위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권력욕이 컸던 동생 태종과도 우애를 유지했고, 태종은 형 부부를 예우해 주었다. 1400년 11월 이방원에게 옥쇄를 넘기고 상왕(上王)이 된 정종은 개성에 있는 백룡산 기슭에 인덕궁을 짓고 20년 가까이를 격구·사냥·연희를 즐기며 유유자적 평안한 생활을 했다.

정종은 재위기간(2년)도 짧았고 제대로 역량을 펼쳐 볼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이렇다 할 치세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부인 정순왕후는 존재감이 미미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왕비이다. 집안이 좋거나 미인도 아니고 영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정종의 아내로 손색없는 현처(賢妻)였다. 정종은 무려 아홉 명의 후궁과 17명의 아들, 8명의 딸들을 두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정안왕후는 본처로서 시기와 질투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남편을 잘 내조하고 분란 없이 집안을 잘 다스렸다. 정종은 이런 정안왕후의 진심과 사랑을 믿었고, 그녀를 존중하고 말도 잘 들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말에 걸 맞는 내조였다.

정안왕후 김씨가 만약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부렸다면 아마도 정종은 물론 자신도 제 명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세상의 무상함과 무소유의 개념을 터득하고, 욕심을 내려놓았던 정안왕후 김씨의 성품과 현명한 처신 덕분이었다. 정종은 1419년 9월 63세로 그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고, 정안왕후 김씨는 정종보다 7년 앞선 1412년 6월 인덕궁에서 남편과 아홉 후궁들, 그리고 25명의 양자들의 따뜻한 임종을 받으며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황해북도 개풍군 영정리에 위치한 후릉(厚陵)으로, 후에 남편 정종도 이곳에 묻혀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정안왕후는 부드러운 성격에 검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척들과도 무난하게 지냈는데, 여기에 남편 정종 역시 정직하고 바른 성격의 인물로 어찌 보면 이들 부부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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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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