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법수직 奉法守職- 법을 받들고 직책을 잘 수행하다.
봉법수직 (奉法守職)- 법을 받들고 직책을 잘 수행하다.
받들 봉(大/5) 법 법(氵/5) 지킬 수(宀/3) 직분 직(耳/12)
중국 正史(정사)의 최고봉으로 치는 司馬遷(사마천, 기원전 145년~86년)의 ‘史記(사기)’는 많이 인용되는 故事(고사)의 보고로 문학적인 가치도 높다. 제왕과 제후의 연대기인 本紀(본기)와 世家(세가)보다도 더욱 많이 읽힌 것이 70편에 이르는 개인의 활약상 列傳(열전)일 것이다.
첫 등장의 伯夷(백이)처럼 개인의 행적을 내세웠는데 循吏(순리), 儒林(유림)처럼 여럿을 묶어 열전을 만든 것도 있다. 뛰어난 기지와 해학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쳤던 인물을 滑稽(골계)열전에 모은 것도 그 하나다. 법을 받들고(奉法) 직책을 잘 지켜(守職) 수행해야 바른 세상이 된다는 성어는 優孟(우맹)을 언급한 곳에 나온다.
우맹은 春秋時代(춘추시대) 楚(초)나라 莊王(장왕)때에 풍자에 능했던 배우였다. 키가 8척에다 뛰어난 말솜씨로 웃으면서 풍자하고 간언했다. 장왕이 아끼는 말이 죽자 대부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는 명을 내렸을 때 더 후하게 군왕의 예로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여 잘못을 바로 잡았다.
장왕을 패왕으로 이끈 현명한 책사이자 대부인 孫叔敖(손숙오)는 우맹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잘 대해 주었다. 손숙오는 병으로 죽을 때 아들을 불러 가난을 면치 못할 터이니 그때는 우맹을 찾으라고 유언했다. 과년 몇 년 뒤 대부의 아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땔나무를 해서 팔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이른 대로 우맹을 찾았다.
우맹은 손숙오의 의관을 하고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어 모두들 대부가 살아 돌아왔다고 여길 정도였다. 얼마 후 장왕의 연회 때 우맹이 축수를 하자 깜짝 놀라며 재상을 맡기려 했다. 사흘이 지나고 부인과 의논한 우맹은 청렴한 대부 손숙오의 아들은 송곳조차 세울 땅(立錐之地/ 입추지지)이 없다고 했다고 하면서 노래한다.
‘청렴한 관리가 되려고, 법을 받들어 맡은 직분을 지키며(念爲廉吏 奉法守職/ 염위염리 봉법수직)’ 죽을 때까지 나쁜 일을 하지 않아도 처자식이 가난한데 그러한 관리는 할 것이 못된다고 대답했다. 장왕은 크게 깨닫고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봉읍을 하사하고 후대까지 제사를 모시게 했다.
우맹이 손숙오의 의관을 하고 왕을 깨우친 고사는 優孟衣冠(우맹의관)이란 성어로 전한다. 아무리 우맹이 그럴듯하게 차렸어도 손숙오가 될 수는 없어 似而非(사이비)한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고 더 판을 치는 세상에 그것을 풍자하여 바로 잡는다면 이런 사이비는 바람직하다.
나중에 부작용이 생겨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정책이 종종 있어도 처음부터 나쁜 의도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두고 보면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밀고 나가다 걷잡을 수 없을 지경까지 간다. 법을 바로 지키려면 우맹의 꼬집는 지혜도, 받아들이는 아량도 필요하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