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업용 미싱
◇ 공업용 미싱
올림픽 ‘호돌이’만큼 1988년을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드라마 ‘인간시장’이다. 그해 한 방송사에서 한 이 드라마를 보려고 월요일 저녁마다 밥상을 물리고 온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았다. 불의에 맞서는 주인공 ‘장총찬’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드라마의 원작자는 김홍신(74)씨다. 동명의 원작 소설이 나온 것이 1981년. 서슬 퍼렇던 계엄 하에서 주인공 이름을 ‘권총찬’으로 붙였다가 검열에 걸려 장 씨로 성을 바꿔냈다. 책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대한민국 최초 밀리언셀러란 수식어가 붙었다. 소설을 쓰며 시민운동을 하던 그의 가슴팍에 국회의원 금배지가 달린 것도 이 영향이 컸다.
그에게 ‘공업용 미싱’이란 ‘연관 검색어’가 생긴 건 단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지난 1998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한 만큼 입을 꿰맨다는 염라대왕이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할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발언은 일파만파. 당시 김 대통령은 정작 “며칠동안 입이 자꾸 이상했다”며 농으로 받았지만 분위기는 험악하게 굴러갔다.
경남 사천의 한 철물점 주인이 “김 의원에게 주겠다”며 공업용 미싱을 차에 싣고 상경했다. 설상가상 검찰에서 구속 이야기까지 나오자 김 의원의 친구인 가수 조영남 씨마저 등판했다. 그는 당시 이런 사과문을 대신 썼다.
“다행히 불구속 처리로 끝나는 분위기라 하니 한숨이 놓였습니다. 친구가 감옥에 들어가있으면 그래도 한 번쯤은 면회를 가줘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그래도 저는 제 친구가 자랑스럽습니다. 의정활동 하나는 폼 나게 잘했거든요.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다음 번에도 그따위 어설픈 소리를 해댈 때는 제가 그땐 미싱이 아닌 뜨개질바늘로(더 아파야 하니까) 녀석의 입을 꿰매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치권에서 일종의 금기어였던 ‘공업용 미싱’이 부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 다음 날인 지난 19일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현직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면 전직 대통령이 된다. 전직 대통령이 되면 본인이 사면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자, 발끈한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이튿날 “공업용 미싱을 선물로 보낸다”고 되받으면서다. 기왕 터진 설전에 참전한다. 단언컨대, 미싱은 죄가 없다.
"-중앙일보 분수대-
",‘공업용 미싱’은 정치권에서 논란을 빚은 대표적인 막말이다. 김홍신 전 한나라당 의원은 지방선거가 임박한 1998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은 사기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염라대왕에게 끌려가면 바늘로 뜰 시간이 없어 공업용 미싱을 입에 드륵드륵 박아야 할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당시 발언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법원도 “정치적 비판의 한계를 넘어섰다”며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공존·상생이 아니라 적의·증오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에서 인신공격성 막말은 정치인에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지지층을 위무하고 결집하는 데 이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상대 진영이 배출한 대통령을 직격할 때는 유난히 자극적인 표현이 동원된다. 노무현정부 때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노 대통령을 “등신”으로 비유했다. ‘환생경제’라는 연극에서는 노 대통령을 “노가리” “육실헐놈” 등 인격모독성 언어를 동원해 비난했다. 이명박정부 때 민주당 의원은 이 대통령을 “쥐박이”라고 했다. 박근혜정부 때는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박 대통령을 겨냥해 ‘귀태(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 운운해 파문을 일으켰다.
다시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공업용 미싱이 20여년 만에 또 정치권에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전직 대통령 사면에 부정적 입장을 내놓자,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문 대통령을 겨냥해 “전직이 되면 본인이 사면 대상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퇴임 후 감옥에 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발끈한 김경협 민주당 의원이 “공업용 미싱을 선물로 보낸다”고 치받았다. 그러자 주 원내대표는 “미싱을 보내면 잘 쓰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정치보복을 시사하고, 저급한 말을 끄집어낸 두 의원 모두 한심하긴 매한가지다.
모름지기 정치는 언어다. 정치인의 말은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정치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다. 정치 언어가 이렇게 추하고 경박해서는 선진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정치는 정치자금 투명화·권력 분산 등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막말이 횡행하는 정치 언어다.
"-세계일보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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