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또 결혼하겠다는 하얀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요"
◇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또 결혼하겠다는 하얀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요"
올해로 결혼 35주년이 되었다. 그 35년 동안 마냥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시댁 식구들이 온화하듯 남편도 그런 편이지만 불뚝성이 좀 있다. 그 불뚝성이 언제 올라올지 몰라 젊어서는 속 좀 끓였다. 10년쯤 살고 보니 요령이 생겨 불뚝성을 아예 건드리지 않거나 오를 낌새일 때 내 쪽에서 얼른 꼬리를 내리면 만사가 평화로웠다.
아무튼 남편의 불뚝성을 관리하면서 살아야 하니 눈치도 봐야 하고 내 성질도 죽여야 하니 스트레스가 없지 않았다. 그 불뚝성이 어느 날부터 기세가 약해지더니 솜사탕처럼 쉽게 녹았다.
두 번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아들의 사춘기였다. 외동인 아들과 나는 사이가 좋았다. 둘이서 유럽 배낭여행을 두 번이나 할 정도니 남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았다. 그런 아들이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뒤늦게 사춘기가 와서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전화나 문자를 `씹는` 건 예사였고 집에 오면 방문을 잠가버렸다. 중2, 고3 다 넘기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고 아들의 행태가 납득이 안돼 부들거리는 나를 남편이 달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나 모르게 아들도 다독거리느라 꽤 바빴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날마다 폭풍 전야였다. 그때 남편이 아들과 나에게 화를 내며 집구석 타령을 했다면, 평화로운 우리의 35주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계기는 나의 갱년기였다. 대부분 여자들에게 갱년기는 인생의 고비지만 내 경우엔 혹독하고 가혹했다. 질병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성격상 주변에 알리지 못했다. 심지어 같이 사시는 친정어머니께도 한동안 비밀로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남편 혼자 감당했다.
회복하는 동안 결혼 30주년을 맞았는데 처음으로 내가 결혼한 남자가 이 사람이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이중고를 겪는 나를 오직 일으켜세우는 데 마음을 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내가 지금 건강을 회복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남편의 헌신 덕분이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결혼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양하고 싶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고생시켜 미안하니 더 좋은 남자 만나 편하게 한번 살아보라고 착한 이유를 대지만 나는 다음 생엔 각자 다른 삶을 살아보자고 정색한다. 사실은 다시 태어나는 게 두렵다. 나는 개인적인 환경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든 태어난 이상 한 번뿐인 인생이 될 텐데 허투루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또다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두 번은 못할 것 같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차는 기분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 빈말이라도 당신과 또 결혼하겠다는 거짓말은 할 수가 없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다음 생에 대한 약속보다는 35년 전 결혼식 때 했던 그 약속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경제 드라마작가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