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자자라는 뜨거운 감자
"◇ 성소자자라는 뜨거운 감자
",신천지, 중국 동포에 이어 이번에는 성 소수자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성 소수자들이 표적이 됐다. 한 매체가, 첫 확진자가 ‘게이 클럽’을 방문했다고 못 박으면서다. 그는 이성애자 클럽도 방문했지만 ‘게이 클럽’이라는 최초의 낙인이 강력했다. ‘성 소수자, 문란한 성행위, 바이러스의 온상’이라는 식의 비난과 혐오가 들끓었다. 급기야 총리가 나서서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비난은 적어도 방역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신천지 때처럼 아우팅(원치 않는 성 정체성 공개)과 불이익을 염려한 성 소수자들이 진단 검사에 불응하는 것을 염려해서다.
작가 최현숙이 한 칼럼에서 지적했듯 사실 이런 식이라면 “공공연하고 은밀하게 자행되는 최고의 밀착행위에 대해 방역 당국의 ‘물리적(사회적) 거리두기’ 세부지침”이 있었어야 했다. 칼럼의 제목은 ‘방역 당국은 섹스를 금하라’였다. 엉뚱하게 성 소수자 혐오로 불똥이 튄 걸 비꼬는 글이었다. 하나둘 드러난 이태원 확진자들은 클럽과 노래방, 술집을 전전했다. 동성애자, 이성애자 가릴 게 없었다. 문제라면 이 비상시국에 밀접 접촉을 무릅쓴 이들의 무책임이지, 특정한 성적 지향은 아니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터키에 이어 둘째로 많은 나라다. 동성 간 성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군 형법이 있고,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다른 사회적 소수자인 이주노동자·북한이탈주민에 대해서보다 높다. ‘반동성애’ 기치를 내건 종교 집단이 있고,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한다.
난민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한 『혐오사회』의 카롤린 엠케는 “무슬림·이주자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단 하나의 틀에 끼워맞추다 보면 그들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남는 것은 미리 만들어진 묘사와 평가에만 의지해 작동하는 축소된 사고뿐”이라고 썼다. 그는 “어떤 기독교인이 어떤 비행을 저질렀을 때만 그들을 언급하고, 기독교인이 저지른 범죄는 모두 기독교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단정한다면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될까”라고 물었다. 분명 우리 이웃으로 살고 있지만 평소에는 없는 사람 취급하다가 이번 사태처럼 ‘성적 일탈’과 관련해서만 불려 나오는 성 소수자들이 딱 그런 처지다.
14세기 흑사병 때 폭도들은 공중 보건이란 미명하에 유대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1890년대 미국에서 천연두는 백인은 잘 안 걸리는 ‘깜둥이 가려움증’ ‘이탈리아 가려움증’ ‘멕시코 혹’으로 불렸다. 재난(감염병)에 대한 공포로부터 내부를 규합할 희생양을 고르고, 그게 ‘질병을 만든’ 타자 혐오로 이어진 인류의 역사다.
사실 코로나19 때문에 바다만 건너면 동양인이란 이유로 균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혐오의 대상이 됐던 게 우리다. 굳이 동성애자를 혐오하진 않아도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싫어할 권리는 있지 않냐는 이들도 있지만, 흑인이나 장애인을 반대하거나 싫어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선진 사회라면 성별·인종·성적 지향·장애에 의해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타인의 성 정체성은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 이성애자가 동성애가 싫다고 말하는 것과, 동성애자가 이성애가 싫다고 말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의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우리 사회 진보·보수 개념의 재정의가 필요하다며 “진보란 정치적 좌우 개념을 넘어 보다 넓은 의미에서 고통과 억압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규정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겪는 고통과 억압을 민감하게 느끼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좌파”이고 “보수는 고통·억압보다 권력·질서에 민감하다”고도 했다. 그의 통찰을 빌려 오면 (성)소수자의 고통과 억압에 둔감한 우리 사회는 진보와 거리가 멀다. ‘진보 정권’의 출현만으로 진짜 진보가, 일상의 진보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