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일절과 파고다공원
■ 삼일절과 파고다공원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100년이 지났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주권을 빼앗긴 뒤, 우리 선조들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나라 안팎에서 크고 작은 투쟁들을 벌여왔다. 1918년 만주에서는 독립 운동가 39명이 대표가 되어 독립 선언을 했고,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2·8독립선언을 했다. 해외에서 들려오는 독립 선언 소식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든든한 용기를 얻은 민족 지도자들은 고종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우선 최남선·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서울의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몇몇 민족 대표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오지 않았고, 남은 대표들은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는 자칫 흥분한 군중이 일본 헌병과 충돌하여 다칠 수 있다고 염려했다. 이들은 독립 선언 낭독의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인사동의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그때 파고다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모여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을 낭독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 대표들이 오지 않아 사람들이 머뭇거릴 때, 어떤 사람이 탑골공원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소에서 지방으로 나르는 역할을 맡았던 정재용 선생이었다. 후일 정재용 선생은 "공약삼장까지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함성과 함께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일제에 억압받아온 우리 민족이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탑골공원에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 쳤다. 이렇게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서울 도심 곳곳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만세 운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하겠다는 뜻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이다.
파고다공원은 원래 고려 시대에 흥복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다. 1464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크게 지었고, 연산군 때 이곳에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악원을 두기도 했다. 1514년 중종 때 원각사 건물이 헐리면서 비석과 10층 석탑만 남게 되었다. 그 후 1897년 고종의 명으로 영국인 브라운이 이곳을 서양식 공원인 파고다공원으로 조성하였고, 1992년에 탑골이라는 이곳의 옛 지명을 따서 탑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유지되고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