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일 월요일

간신 유자광 1편

■ 간신 유자광 1편

■ 간신 유자광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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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들을 하나만의 잣대로 충신이니 간신이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간신이 유자광(柳子光)이다. 유자광은 한마디로 ‘고변(告變)과 음해(陰害)로 정적(政敵)을 숙청해 개인의 영화를 누리다가, 결국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끝낸 조선의 대표적 간신(奸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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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태종 때 서얼차대법을 만들어 서얼(庶孼)의 벼슬자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조선사회는 아무리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도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니고 일반 백성 출신을 첩으로 취해 자식을 얻으면 서자(庶子)라 했고, 일반 백성도 아닌 노비나 기생 등 천한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얻어 자녀를 얻으면 얼자(孼子)라 했다. 이 둘을 합쳐 서얼(庶孼)이라고 한다. 서얼출신들은 아버지가 영의정이라 해도 벼슬길이 제한되었고, 문과 과거시험은 아예 볼 자격조차 없고,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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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은 세종21년(1439년)에 경주부윤을 역임한 유규(柳規)의 서얼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최씨는 노비 출신이었다. 유자광은 형제들로부터 형제 취급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로부터도 아들 취급을 받지 못했다. 야사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 유규가 낮잠을 자다가 백호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서 여종을 취하여 유자광을 얻었다고 한다.

아버지 유규는 유자광의 비범함을 미리 짐작하고 큰일을 낼 것을 염려하여 그를 없앨 생각을 하였다. 하루는 요천에 큰물이 나서 범람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유자광에게 요천 건너 메밀밭에 가서 메밀 싹이 잘 났는지 보고 오라고 하였다. 요천을 건너다가 물에 빠지면 죽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유자광은 아버지의 말대로 요천으로 갔다. 아버지가 몰래 유자광을 뒤따라 가보니 큰물이 난 요천을 유자광은 나무판자를 타고 건너갔다. 집에 돌아온 유자광에게 아버지가 “메밀이 잘 났더냐”고 물으니, 메밀이 날 데는 안 나고 안 날 데에 났더라고 빗대어서 얘기했다고 한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선택할 수도 없는 서얼이라는 굴레는 한평생을 좌우하는 거대한 걸림돌이자 지울 수 없는 낙인(烙印)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홍길동처럼 반란과 망명을 선택하는 저항의 길. 다른 하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체제에 협력하며 그 장애를 뛰어넘는 순종의 길이다. 이런 시대에 서얼로 태어난 유자광은 서얼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후자(後者)의 길을 선택했다.

유자광은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권력에 빌붙어서 피비린 내 나는 역모(逆謀)와 사화(士禍)라는 참극의 원인 제공자로 오늘날까지 그 오명(汚名)이 남아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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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으ㅢ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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