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유자광 1편
■ 간신 유자광 1편
"역사 속 인물들을 하나만의 잣대로 충신이니 간신이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간신이 유자광(柳子光)이다. 유자광은 한마디로 ‘고변(告變)과 음해(陰害)로 정적(政敵)을 숙청해 개인의 영화를 누리다가, 결국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끝낸 조선의 대표적 간신(奸臣)이다.
", "조선은 태종 때 서얼차대법을 만들어 서얼(庶孼)의 벼슬자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조선사회는 아무리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도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니고 일반 백성 출신을 첩으로 취해 자식을 얻으면 서자(庶子)라 했고, 일반 백성도 아닌 노비나 기생 등 천한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얻어 자녀를 얻으면 얼자(孼子)라 했다. 이 둘을 합쳐 서얼(庶孼)이라고 한다. 서얼출신들은 아버지가 영의정이라 해도 벼슬길이 제한되었고, 문과 과거시험은 아예 볼 자격조차 없고,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가 가능했다.
",유자광은 세종21년(1439년)에 경주부윤을 역임한 유규(柳規)의 서얼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최씨는 노비 출신이었다. 유자광은 형제들로부터 형제 취급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로부터도 아들 취급을 받지 못했다. 야사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 유규가 낮잠을 자다가 백호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서 여종을 취하여 유자광을 얻었다고 한다.
아버지 유규는 유자광의 비범함을 미리 짐작하고 큰일을 낼 것을 염려하여 그를 없앨 생각을 하였다. 하루는 요천에 큰물이 나서 범람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유자광에게 요천 건너 메밀밭에 가서 메밀 싹이 잘 났는지 보고 오라고 하였다. 요천을 건너다가 물에 빠지면 죽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유자광은 아버지의 말대로 요천으로 갔다. 아버지가 몰래 유자광을 뒤따라 가보니 큰물이 난 요천을 유자광은 나무판자를 타고 건너갔다. 집에 돌아온 유자광에게 아버지가 “메밀이 잘 났더냐”고 물으니, 메밀이 날 데는 안 나고 안 날 데에 났더라고 빗대어서 얘기했다고 한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선택할 수도 없는 서얼이라는 굴레는 한평생을 좌우하는 거대한 걸림돌이자 지울 수 없는 낙인(烙印)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홍길동처럼 반란과 망명을 선택하는 저항의 길. 다른 하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체제에 협력하며 그 장애를 뛰어넘는 순종의 길이다. 이런 시대에 서얼로 태어난 유자광은 서얼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후자(後者)의 길을 선택했다.
유자광은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권력에 빌붙어서 피비린 내 나는 역모(逆謀)와 사화(士禍)라는 참극의 원인 제공자로 오늘날까지 그 오명(汚名)이 남아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으ㅢ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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