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1편
■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1편
손가락 마디가 잘린 안중근의사의 손도장은 오늘날 우리에게 태극기만큼 강한 애국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안중근은 용맹한 군인이며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는 실천가였다.
1909년 3월 연해주의 한 마을, 안중근을 비롯한 몇몇의 청년들은 단지(斷指)동맹 취지문을 읽어나갔다.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은 손가락 한 마디를 절단하고 그 피로써 태극기에 네 글자를 써내려갔다. 안중근은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 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 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 일정을 잡았다.
마침내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20분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역에 특별 열차가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의사는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를 외치며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사열을 마치고 일본인 환영단 쪽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두어 걸음을 옮겼을 때, 안중근의 오른손에 쥐어진 블로닝 권총에서 발사된 3발의 총탄은 정확히 그의 복부에 명중했다. 순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러시아 관헌대는 그를 덮쳤다.
수행원들은 곧바로 이토를 침대로 옮기고 응급치료를 했다. 탄환은 몸을 관통하지 않고 모두 몸에 박힌 상태였다. 한 발은 오른팔을 뚫고 왼쪽 가슴에, 두 번째 총탄은 가슴과 배를 뚫고 왼쪽 갈비뼈 밑에, 그리고 세 번째 총탄은 왼쪽 복부에 박혔다, 피격 30분 후인 오전 10시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31세 청년 안중근에 의해 68세의 생을 마감했다.
일제는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의 신병을 국제법도 무시한 채 신속하게 처리했다. 안중근의사는 수차례의 재판 과정에서도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일본인 재판관들을 당황시켰다고 한다. 이는 단지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사상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910년 2월 안중근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순국 하루 전인 3월25일 안중근의 두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 형제가 마지막 면회를 왔다. 삼형제는 잠시 기도를 한 뒤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두 동생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어머니와 부인, 가족들을 위한 유서를 동생에게 전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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