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소방관 1편
■ 조선의 소방관 1편
1426년(세종8년) 2월 한양에서 방화(放火)로 인한 큰 화재로 한성부 남쪽에서 집 2,170채와 행랑채 106칸을 태우고 32명이 불에 타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한양 인구는 약 10만 명에 백성이 사는 집은 1만6921채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피해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은 때마침 세차게 불어오는 서북풍 때문에 순식간에 한성의 중부, 북부, 남부 민가로 번져갔고, 일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집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 한 집에 불이 나면 온 동네를 태우고 나서야 꺼졌기 때문에 화재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다행히 종묘와 궁궐로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지만, 거리에는 어린아이와 노인 등 급작스러운 화재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이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세종은 강원도 횡성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가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시각각 화재 대책을 지시하면서 환궁(還宮)을 서둘렀다. 이 화재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종루 옆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 하지만 요즘 소방서와 다른 점은 불이 나도 금화도감에서는 직접 불을 끄러 출동하지는 않았다. 금화도감은 백성들에게 예방교육을 철저히 실시하고, 대비책을 강구하는 업무에 힘썼다. 불이 이웃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도록 가옥과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았는데, 이 때 울타리나 담은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무로 짓게 했다. 또, 불이 났을 때 신속히 끌 수 있도록 사다리와 물 푸는 그릇 따위를 각 마을마다 준비하게 하고, 우물이 부족한 마을은 물독을 다섯 집마다 한 개씩 갖춰 방화수를 저장해 두는 등 방화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이었다. 또 화재로 해를 입은 사람들이 당분간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재민 구휼에도 힘썼다.
불이 난 지 한 달 만인 3월 6일, 방화범 이영생과 장원만 등 일곱 명이 붙잡혔다. 동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죄로 관청에서 재산을 몰수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재를 일으킨 것이었다. 조선은 1425년(세종7년) 2월 처음으로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유통시켰는데, 4월에는 저화(楮貨:고려 말 만들어진 닥나무로 만든 종이돈) 사용을 금지하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를 어기면 경제사범이 되는 것이다. 특히 죄가 중한 자는 군중이 보는 곳에서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수군으로 강제 편입시켰으며, 재산은 관에서 몰수했다. 또 범인을 고발한 자에게는 죄인의 재산 반을 상금으로 주었다. 이 형벌이 너무 과해 한때 방화를 저지르는 자들이 창궐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 이미 ‘금화령’이 만들어져 있어 방화범(放火犯)은 대부분 극형인 능지처참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대사령(大赦令) 때도 사면되지 않는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실수로 불을 냈다 해도 엄벌에 처하고, 자기 집을 태운 사람은 볼기 40대, 남의 집을 태운 사람은 볼기 50대 맞았다. 종묘(宗廟)와 궁궐을 태운 자는 설령 실수라 할지라도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고, 궁궐 창고를 지키거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났을 때 혼자 도망가면 곤장 100대를 쳤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