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2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2편
조식의 상소문 파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6세기 언관과 사관들의 언론 보호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점이다. 조식 상소문에 대해 당시 조정에 포진해 있던 대신들이나 언관들은 조식을 적극 변호했고, 궁극적으로 명종의 불편한 심기를 완화시켜 조식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조정 대신들과 언관,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자 조식에 대한 처벌은 왕의 언론 탄압으로 비화됐고, 결국 명종은 조식을 처벌할 수가 없게 됐다. 조식의 상소문 파문은 명종 시대에 재야의 언론까지 수용하는 정치 문화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왕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을 한 재야의 선비 조식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조식의 호는 남명, 본관은 창녕으로,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아버지 조언형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언형이 문과를 거쳐 판교에 오르고 숙부 언경이 이조좌랑에 올랐지만 사화의 여파는 강직한 선비 집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1519년 기묘사화(중종)가 발생하자, 숙부 언경은 조광조 일파로 지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조식의 처가는 일찍이 전라도에서 이주한 남평 조씨로 장인 조수는 김해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부호였다. 조식은 한때 처가 소재지인 김해 탄동에 거주하면서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그가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부유한 처가의 힘이 컸다. 조식은 젊은 시절부터 제자백가의 여러 학문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노자나 장자의 문장에도 흥미를 느꼈다. ‘남명’이라는 호는 ‘장자’의 《소요유》 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조식은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한양 장의동 부근에서 살았다. 30세에서 48세까지는 처가인 김해, 48세에서 61세까지는 합천에서 거처한 후 만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김해, 합천, 진주로 이어지는 경남 지역은 남명 학문의 산실이었다.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에 합천을 떠나 지리산 산천재에 마지막 터전을 잡았다.
조식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을 동시에 강조했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조식 사상의 핵심이다. 조식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중요시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제자들에게 늘 강경한 대왜관(對倭觀)을 심어줬다.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최고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식은 생전에 10여 차례 이상 지리산을 유람했고 지리산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죽음도 말년까지 후학을 길렀던 지리산 산천재에서 맞았다. 묘소는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앞으로 덕천강이 흐르고 뒤로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를 배향한 덕천서원도 인근에 조성돼 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