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당정치朋黨政治 2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2편
사림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는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로 흐르니, 그 시초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다. 사림들은 네 번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난 후 어렵게 조정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이 나누이게 되었고, 이러한 붕당정치는 이후 조선 정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당(黨)이란 정치적 견해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자 조직한 단체를 말한다. 오늘날 여러 정당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듯, 조선시대에도 붕당(朋黨·학맥과 사상, 정치적 견해차에 따라 뜻이 맞는 사람들의 모임)이 나누이게 되었다.
즉, 붕당정치는 요즘 시대로 말하면 정당정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정책을 논하고 상대를 견제하면서 국민들을 위해서 싸운다면 정당정치는 민주정치의 기본이고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와 백성은 뒷전이고 눈앞의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위해서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붕당의 폐단은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백성들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쓸데없는 학문적 논쟁을 일삼기 일쑤였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방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니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니 하는 논쟁에 목숨을 걸고 다투기도 하였다.
선조 7년, 관리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으며 높은 관직으로 가는 출세가도의 요직(要職) 중의 요직인 ‘이조(吏曹) 전랑’ 자리가 비게 되자, 젊은 사류(士類) 중 명망이 높은 김효원이 추천되었으나, 당시 대선비로 평판이 좋던 심의겸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훈구파이자 간신이었던 윤원형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선조는 심의겸의 상소를 받아들여 김효원을 다른 자리로 보냈고, 김효원은 2년 뒤에나 ‘이조 전랑’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에게 독을 품으며 차근차근 세력을 키웠다.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에 후임자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비 집안에서 중요한 벼슬을 하면 권력이 집중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왕비가 심의겸·심충겸의 집안 출신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 하는 측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서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는데,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낙산 건천방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인 정릉동에 있다고 해서 서인(西人)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것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시작이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김종직·이황·조식의 제자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출신이었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은 대개 이이·성혼의 제자로 이루어진 기호학파 출신이었다. 붕당 사이의 비판과 견제는 공론(公論)을 형성할 때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지나친 당파 싸움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