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릉王陵 2편
■ 왕릉(王陵) 2편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개의 왕릉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에 조성된 왕릉은 예종의 창릉과 숙종의 명릉 2기이고, 추존된 왕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창릉까지 합해도 3기이다. 서오릉이라 한 것은 왕비의 능인 익릉(숙종의 첫째부인 인경왕후)과 홍릉(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이 포함되어 5개의 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숙종과 첫 번째 계비(繼妃)인 인현왕후가 나란히 묻혀 있을 뿐 아니라, 10세 때 혼인한 조강지처 인경왕후와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의 무덤까지 함께 있다. 인현왕후는 숙종과 나란히 묻혀 있고, 유언을 남기면서까지 숙종 곁에 묻히고 싶어 했던 인원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무덤 좌측의 언덕 높은 곳에 조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어 두 사람을 질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한때는 숙종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장희빈이 1970년 이곳에 왔다. 사후 270년 만이다. 원래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오포면 문형리)에 거의 폐허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장희빈의 무덤이 발견되자 후세 사람들이 알아서 숙종 곁에 모시고 온 것이다. 비극적인 최후만큼이나 장희빈의 무덤은 서오릉 경역에 옮겨진 이후에도 봉분이나 석물들이 모두 초라하고 옹색하다. 그러나 어쨌든 3명의 정비(正妃)와 한 명의 후궁(장희빈도 한때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여인이다) 등 4명의 사랑했던 여인과 죽어서도 함께한 숙종은 생전에 그러했듯이 죽어서도 가장 여복(女福)이 터진 행복한(?) 왕이 아닐까. 물론 재위 시절에는 이들 여인들과 얽힌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이 여러 차례 전개되기도 했지만….
여기에 숙종의 며느리인 정성왕후(영조의 정비)의 무덤인 홍릉(弘陵)이 숙종의 무덤 근처에 있다. 영조는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어렵게 왕비의 자리에 오른 정성왕후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1757년 정성왕후는 사망하였다. 영조는 왕비의 무덤을 부친인 숙종의 무덤 근처에 만들고 옆 자리를 비워 두게 하였다. 훗날 자신도 죽으면 그 옆자리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1759년 66세의 영조는 15세의 신부(정순왕후)를 맞이했고, 1776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조는 영조의 무덤을 동구릉 자리에 만들었다. 아직 살아 있는 왕대비 정순왕후(영조의 계비)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영조의 무덤(원릉)은 동구릉 내에 조성되었고, 무덤 옆의 빈 자리는 1805년에 사망한 정순왕후의 차지가 되었다. 결국 애매하게 정비인 정성왕후의 무덤은 홀로 서오릉에 남겨진 셈이다. 죽어서도 시아버지 숙종과 네 명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