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2편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2편
그로 인해 궁중이 발칵 뒤집히자 성종은 내명부에 봉작된 23명의 후궁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문초했지만 범인을 색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소용 정씨소행으로 결론 났으나, 중전 윤씨의 처소에서 주술 방법이 적혀있는 방양서(方禳書)와 극독(劇毒:지독한 독)인 비상(砒霜)이 발견되었고, 투서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재질의 종이도 발견되면서 결국 윤씨의 소행이 드러났다. 비로소 진상(眞相)을 모두 알게 된 성종은 분노하였고,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하려 했지만 대신들이 앞 다투어 말렸다. 그녀가 원자(元子)의 생모(生母)였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불문에 붙였지만, 주술을 도와준 어머니 신씨의 직첩을 회수하고 궁궐 출입을 금했다. 그리고, 흉물을 궐내로 반입한 중궁전 나인 삼월이는 교수형에 처했으며, 나인 사비는 장형 100대를 때리고 변방(邊方)의 관비(官婢)로 내쫓았다. 가까스로 처벌을 면한 중전 윤씨는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 동안은 은인자중(隱忍自重:참고 견디며 몸조심하다)하며 살았다. 하지만 성종의 여성편력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여러 후궁처소를 들락거리며 중전 윤씨 마음을 아프게 했고, 성종에 대한 원망이 가슴 속에 쌓여만 갔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고 성종의 사랑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성종이 후궁의 처소에 들었다는 것을 듣고 후궁의 처소까지 난입하여 패악을 부리던 윤씨는 결국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야 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분노한 인수대비는 성종에게 즉시 그녀를 폐서인(廢庶人)하라고 요구했다. ‘내훈(內訓:훈계)’이라는 책을 써서 내명부를 교육시킬 정도로 여성의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어머니였다. 이미 윤씨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성종은 못이기는 척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때는 삼촌인 신숙주도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윤씨는 대비들은 물론 성종의 후궁들과도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이윽고 성종이 조정에서 폐비 문제를 거론하자, 대신들은 윤씨가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성종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성종의 결심이 굳건함을 알게 된 대신들은 만일 폐비하더라도 윤씨는 세자의 생모이므로 별궁에 안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종은 대비의 뜻이라며 그녀를 친정어머니 신씨와 살도록 명했다. 1479년(성종 10년) 6월, 마침내 중전 윤씨는 직첩을 빼앗기고 폐서인(廢庶人) 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났다. 원자(연산군)의 나이 4살이었다. 왕비를 폐출시킨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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