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희 3편
■ 황희 3편
황희는 조선 초기에 활동한 훌륭한 정치가로 첫손가락에 꼽힌다. 또 청빈과 근면을 생활지표로 삼았다. 오늘날 공직자들이 본받아야할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보일 행동을 많이 했다. 그가 순하고 사람 좋기로 알려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자기 집 계집종들이 싸움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계집종이 황희 앞으로 달려와 고자질을 하자,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자 다른 계집종이 억울하다는 듯이 달려와서 울며 말했다. “대감마님, 거짓말입니다.” 하자, “그래, 네 말도 옳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희의 아들이 물었다. “어찌 아버지께서는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십니까?” 황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네 말도 옳구나!”
그러나 그는 결코 무골호인(無骨好人)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는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한 치의 빈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작은 일에는 너그럽고 큰일에 엄격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청렴결백했다. 벼슬자리에 오르면 그 권세로 재물을 늘리는 도구로 삼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녹봉(祿俸:나라의 봉급)만으로 가족과 종들의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 보니 늘 살림은 쪼들렸고, 그의 집은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해 늘 비가 샜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비 오는 날이면 방 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을 철저히 했고,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벼슬자리를 주지 않고, 과거시험이나 능력에 따라 정당하게 벼슬을 주도록 했다.
그는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죽자,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했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두 놀라고 탄식하면서 조상(弔喪)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러 관청의 아전들과 종들도 모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 지냈으며,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 《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 -
오늘날 그의 유적은 파주 일대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임진강 언덕 위에 있는 반구정(伴鷗亭:기러기와 벗하는 정자)은 그가 만년에 임진강 철새들을 바라보면서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황희의 초상화는 불행하게도 일본의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초상화를 보면 무골호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체격이 크고 가슴과 어깨가 벌어져 있으며, 수염과 짙은 구렛나루가 무인(武人)과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의 행적과 조선 전기의 야사를 보면 그는 도량이 크고 선이 굵은 인물로, 소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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