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량대첩 3편
■ 명량대첩 3편
이순신의 기함(旗艦:사령관의 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 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일본 배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선두함이 걸려 들었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몰려오던 일본 전선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그러나 일본 수군들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부어 대며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발사됐다. 머리통만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이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일본 수군 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조선 함선은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화포로 쏘며 추격해 완전히 섬멸해버린다. 이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 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 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수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불과 2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쇠사슬과 울돌목(鬱陶項)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일본 수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전멸하고,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전함의 피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사상자는 모두 합쳐 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사상자의 이름, 부상의 정도까지 직접 기록할 만큼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적었다. 남은 13척의 함대를 모두 추정해 볼 때 전사자가 약 30명, 부상자가 약 40명으로 모두 70~100명 미만의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은 그 피해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불타고 부서진 배는31척, 약 90척은 심하게 파손된 채 달아났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이 신화적인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이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불멸의 금자탑이다. 명량대첩은 한순간 빼앗긴 조선의 해상권을 되찾은 값진 전투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