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암살의 진실 3편
■ 김구 암살의 진실 3편
1960년 4·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여 개월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 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다. 하지만,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하지만, 안두희에 대한 응징은 계속되었다. 가장 먼저 응징을 다짐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 사람은 곽태영씨다. 곽씨가 백범 암살범을 응징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곽씨는 “고향인 김제에서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묘소에 참배를 갔다. 그 때 나는 10년 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안두희를 처치해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선생님께 다짐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곽씨가 응징의 의지를 실천에 옮긴 것은, 안씨를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던 ‘10년 기한’의 마지막 해인 1965년 12월이었다. 당시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신의기업사’라는 군납회사를 운영해 도내 납세 실적 1~2위를 다툴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행상을 가장해 양구에 잠입한 곽씨는 며칠 동안 안씨 집 주변을 배회하며 치밀하게 기회를 엿본 끝에 12월 22일 ‘거사’를 결행했다. 아침 9시쯤 안씨 집에 침입하여 세수하던 안씨와 격투를 벌인 끝에, 그의 목덜미를 칼로 찌르고 마당에 있던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안씨는 이 사건으로 뇌수술을 세 번이나 한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2월 곽씨는 춘천지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5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1966년 7월30일 풀려났다.
이 사건이 잊혀갈 무렵, 백범 암살에 대한 진상 규명 문제를 다시 사회적 관심사로 끌어올리며 민족반역자 안두희 응징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권중희씨(1936-2007)다. 권중희씨가 안두희를 응징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안두희가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은밀히 여권을 발급 받았다는 신문 기사가 보도된 1981년 12월 즈음이었다. “중학교 때 존경하던 백범 선생 암살범이 안두희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 한구석에서 응징의 칼을 갈아왔다”는 권씨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안두희를 붙잡아 암살의 진상을 자백하게 하고, 그에게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