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적 임꺽정 4편
■ 의적 임꺽정 4편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사형 당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앞 시대의 홍길동(洪吉童),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임꺽정을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활동은 정부·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농민들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백성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 뒤 임꺽정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이 가장 유명하다. 홍명희가 생각한 임꺽정은 도적이 아닌 민중의 영웅이었다. 실존하는 인물에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여 새로운 역사 인물을 재창조한 것이다. 1928년부터 10년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소설 임꺽정은 민족해방운동이자 현실적 저항 운동의 일환이었다.
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명종실록》의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읽고 있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