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붕당정치朋黨政治 4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4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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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659년 효종이 죽어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1674년 효종 임금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들은 크게 두 차례의 다툼을 벌였다. 이 사건을 궁중 의례나 예절에 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 하여 예송(禮訟)논쟁이라고 한다. ‘1차 예송논쟁’ 때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들이 세력을 잡았다가, ‘2차 예송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숙종 때는 남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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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 남인의 세력 다툼이 이어지다가 숙종 때 남인이 권력에서 물러나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다. 1680년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허적이 자기 집에서 열린 잔치에 궁중에서 쓰던 천막을 왕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빌려갔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허적은 이 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몇 달 뒤에는 허적의 아들까지 역모를 꾀하였다고 서인에게 고발당했다. 이때 허적을 비롯한 많은 남인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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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등 주로 나이든 서인들은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자고 했지만, 윤증을 비롯한 젊은 서인들은 남인을 너무 강력하게 몰아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송시열이 늘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며 스승을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서인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나이든 신하들과, 윤증을 비롯한 젊은 신하들이 모인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나이든 세력을 늙을 노(老)를 써서 노론(老論), 젊은 세력을 젊을 소(少)를 써서 소론(少論)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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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붕당은 처음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지면서 흔히 ‘사색당파(四色黨派)’라고 한다. 그 뒤 북인은 대북과 소북, 노론은 시파와 벽파 등으로 계속 분파되면서 조선은 당파를 중심으로 정치 대립이 치열하게 이어지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때로는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책을 논하면서 정치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하지만, 당리당략을 일삼고 정권을 잡기 위해 왕위계승과 세자책봉, 왕비간택 등에 까지 깊이 관여하면서 권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붕당정치의 폐단은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영조와 정조에 이르러서는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를 펼치려는 탕평책을 펼치기도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