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암살의 진실 5편
■ 김구 암살의 진실 5편
1981년 12월 17일 안두희는 "백범 암살 진상에는 더욱 복잡한 사연이 있다. 그래서 진상을 폭로하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이 일 것이다.(중앙일보:1981.12.18.)“ 라며 증언한 바 있다. 또한, 세간의 눈을 피해 살던 안두희는 죽기 전인 1989년 병든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TV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암살의 배후에 대한 질문에 안두희는 “조금 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세월이 되어야 이야기할 수 있다”라며 아직도 건재한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부족하나마 끈질기게 끌어낸 안두희의 단편적 증언을 종합해 보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이승만이 직접적인 지령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 개입하였던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사전개입을 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뿐이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결론이다.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안두희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의혹과 자세한 배후 등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안두희가 확실한 증언을 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이 의문은 끝내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