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6편
■ 이순신 6편
임진왜란 당시 남해 일대에서 일본 수군을 연파해 일본의 조선 점령과 중국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순신이다. 일본은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함경도까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군에게 전라도를 돌아 황해를 북진하는 수군의 보급선이 연결된다면 조선 점령을 매듭짓고 중국까지 치고 들어간다는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전략은 일본군의 침략을 거의 유일하게 대비한 조선군 지휘관이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순신의 활약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의 연전연패 소식에 놀라 아예 “조선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데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戰果)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거짓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을 모함하는 원균 등 악독한 지배층과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선조의 독단이 낳은 결과이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비겁한 자신에 비해 뛰어난 이순신의 활약을 거북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을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압슬형과 같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의 맹활약으로 지켜지고 있던 전라도 지역은 1597년 이후 처참한 지옥으로 변했다. 선조의 명령으로 이순신을 투옥시키고 대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세운 뒤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16일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패전 뒤 채 20일도 안되어 전라도는 살육과 방화, 고문, 인신매매, 구타 등등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조선인의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일본으로 가져간 일본군의 악랄한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조선 수군이 패배한 한 달 뒤부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 다이묘(大名·영주)들에게 “전공(戰功)의 증명은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의 수로 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는 군령을 내린 것이 1597년 8월이다. 당시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돌파하지 못한 곡창지대이자 전략 요충인 전라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고 일본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은 조선군은 물론 남녀노소, 승려, 노비,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비전투원의 코까지 무더기로 베어냈던 것이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