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3일 토요일

조선어학회 사건

■ 조선어학회 사건

■ 조선어학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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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일본 헌병과 경찰을 우리 땅 곳곳에 배치해 한국인들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1920년대에는 한국 전통과 문화를 존중해주는 척하며 한국인을 다스리는 문화통치로 한반도를 지배했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서 미국·유럽에서 경제 대공황(제1차 세계대전 직후 과잉 생산과 실업자 증가 등으로 불거진 불경기)이 시작되자, 일본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제는 전쟁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31년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고, 더 나아가 1937년엔 중국을 상대로 전쟁(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한반도를 자기들 전쟁에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삼고, 한편으로는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뭉개 없애려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른바 민족문화 말살정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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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일본식 성을 새로 만드는 것)을 실시했고, 나라 곳곳에 일본의 조상신과 일본 황실을 섬기는 신사를 만들어 참배를 강요했다. 학교에서도 한국 역사 대신 일본 역사를 배우도록 했고 한국어 교육을 완전히 없애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과 한글로 된 잡지도 전부 발간하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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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도 이어졌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선생 등을 중심으로 우리말과 우리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앞장섰던 민간 학술단체이다. 1908년 8월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가 이후 배달말글돋음 한글모 조선어연구회 등을 거쳐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26년엔 오늘날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했고, 잡지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애썼다. 장지영, 최현배, 이윤재, 이희승 등이 중심이 돼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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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가 빌미가 됐다. 한 기차 안에서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이던 박영옥이 친구들과 한국말을 쓰다가 조선인 경찰관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게 되었다. "너는 조선어 사용 금지도 모르나? 어째서 한국말을 쓴 거야?" 박영옥을 윽박지르던 경찰관은 박영옥이 서울의 정태진이라는 인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태진이란 인물을 뒷조사한 결과 그가 서울에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 경찰은 정태진을 잡아다 ‘조선어학회’라는 모임이 순수 학술 연구 모임이 아니라 민족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학자들을 33명이나 붙잡아 혹독하게 고문하고 28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과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 끝에 이윤재, 한징 등은 목숨을 잃었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은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재판부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 운동의 형태"라며 내란죄(內亂罪:폭동 등에 의해 국가 존립과 헌법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범죄)를 적용했다. 이처럼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 조선어학회는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가 1945년 광복 후 조직을 다시 정비해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으로 된 \큰사전\을 펴냄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