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광해군의 실리외교

■ 광해군의 실리외교

■ 광해군의 실리외교

임진왜란은 조선, 명, 왜 삼국이 한반도에서 벌인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다. 전쟁의 무대가 한반도였던 관계로 수많은 우리 백성들이 죽고 국토가 피폐해졌으며 국가체제는 무너졌다. 전쟁 이후 광해군에게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전후 수습과 복구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명이 쇠퇴하고 후금(청)이 강성해지면서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을 때였다. 명은 조선에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것을 빌미로 명나라가 후금을 치는데 출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후금이 명보다 우세하다고 판단, 명의 요청을 들어 주는 척하면서 당시 최고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비밀명령을 통해 적당히 싸운 척하다가 후금에게 투항하도록 해서 후금의 원성을 사지 않고 전쟁을 막아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또 다른 전쟁에 내 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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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을 기본외교정책으로 삼았다. 여기서 사대(事大)는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교린(交隣)은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즉 사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이고, 교린은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외교책이었다.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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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조공(朝貢:약소한 나라가 강대한 나라에 정치·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을 헌상)과 책봉(冊封:중국의 황제가 국내외 귀족이나 공신에게 왕 또는 공. 후 등의 작위를 주는 것)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대교린정책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대해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무조건적 충성의 맹목적 사대주의에 빠져 든다. 그리하여 서인들은 중립적 실리외교를 표방하던 광해군을 ‘폐모살제(廢母殺弟)’ 라 하여 쫓아내고(인조반정), 교린 상대에 불과했던 여진족인 후금을 우습게보고 배금정책을 쓰다가 또 다시 큰 전란(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다.

두 번의 호란(胡亂)으로 수십만의 백성들이 죽거나 청으로 납치되었고 수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렸으며, 인조가 청 황제 앞에 나아가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면서 한번 절할 때 땅에 머리를 세 번씩 부딪힐 정도로 조아림)’ 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수모(삼전도의 굴욕)를 당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