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금일학一琴一鶴 - 거문고 하나와 학 한 마리, 청렴결백한 관리
일금일학(一琴一鶴) - 거문고 하나와 학 한 마리, 청렴결백한 관리\xa0
한 일(一/0) 거문고 금(玉/8) 한 일(一/0) 학 학(鳥/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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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고 깨끗하여 주변의 뇌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법을 집행한다. 이런 관리라면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淸白吏(청백리)를 먼저 떠올린다. 조선시대에 정착된 제도로 살아있는 경우에는 廉勤吏(염근리)라 칭하며, 孟思誠(맹사성), 黃喜(황희) 등 명재상을 포함하여 모두 217명이 배출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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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도 이런 사람이 없을 수 없다. 後漢(후한)때 四知三惑(사지삼혹)으로 알려진 楊震(양진)과 楊秉(양병) 부자가 있고, 강직한 관리의 대명사 包靑天(포청천)으로 유명한 北宋(북송)의 包拯(포증), 그리고 이보다 조금 후세의 趙抃(조변, 1008~1084, 抃은 손뼉칠 변)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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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이라 하면 거문고 하나(一琴)와 한 마리의 학(一鶴)이 전 재산이란 청렴결백한 관리의 대명사다. 그는 아호부터 그릇됨을 아는 知非子(지비자)로 사람 됨됨이가 강직했다. 처음 진사로 벼슬을 시작하면서 주변의 추천을 받고 殿中侍御使(전중시어사)란 자리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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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은 재상이 조정의 업무를 처리하는 재능이 없고, 불법을 저지른 고관은 보두 파면되어야 한다는 등 權貴(권귀)를 두려워않고 잘못을 따져 탄핵하여 鐵面御史(철면어사)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다 시기를 받아 파직되고 지방 태수로 내려가서도 잘못된 기풍을 바로잡으며 백성들의 높은 신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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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원)나라 때 托克托(탁극탁) 등이 편찬한 ‘宋史(송사)’에 조변의 후일담이 실려 있다. 북송의 6대 황제 神宗(신종)이 즉위하자 조변을 다시 중앙으로 불러올려 감찰 업무를 맡겼다. 신종은 조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지방 태수로 부임할 때 말 한 필로 갔다면서 ‘거문고 하나와 학 한 마리만을 함께 했는데, 그의 청렴결백한 다스림은 칭찬받을 만하다(以一琴一鶴自隨 爲政簡易 亦稱是乎/ 이일금일학자수 위정간역 역칭시호)’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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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의 강직한 성품은 조선의 中宗(중종)실록에도 인용됐다. ‘하루 동안 한 일을 그날 밤에 반드시 분향하고 하늘에 고하였으니(一日所爲 其夕必焚香告天/ 일일소위 기석필분향고천), 이러한 일들은 제 몸에 매우 유익한 일이다(如此之事 有益於身至矣/ 여차지사 유익어신지의).’\xa0거문고와 학이든 우리의 청백리 전통이든 다수의 관리들은 지키려 노력한다.\xa0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인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큰 단위의 독직은 사라졌다고 해도, 은연중 편의를 봐주며 뒷돈을 요구하는 비리는 있는지 감시를 늦춰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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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범죄를 저질러도 노골적으로 자기편을 봐주는 일까지 드러나 억장이 무너지게 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변의 좌우명 중에서 재물에 관한 명언이 있다. ’큰 집이 1000칸이라도 밤에 눕는 것은 여덟 자의 공간이면 된다(大廈千間 夜臥八尺/ 대하천간 야와팔척).‘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