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사생유명死生有命 - 사람의 살고 죽음은 모두 천명에 달려 있다.

사생유명死生有命 - 사람의 살고 죽음은 모두 천명에 달려 있다.

사생유명(死生有命) - 사람의 살고 죽음은 모두 천명에 달려 있다.

죽을 사(歹/2) 날 생(生/0) 있을 유(月/2) 목숨 명(口/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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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든, 훌륭한 업적을 남기든 누구나 목숨은 유한하다. 대의를 위해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는 위인이 있는가하면 몹쓸 죄를 저지르고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소인도 있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며 삶은 죽음 때문에 존재한다고 깊이 생각하는 철인이나 생사의 기로에서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 한 햄릿(Hamlet)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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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중생들은 세상이 아무리 苦海(고해)라 해도 죽지 못해 산다며 삶에 대한 애착이 더 크다. 정곡을 찌르는 비유의 속담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죽은 석숭보다 산 돼지가 낫다’ 등이 잘 말해준다. 石崇(석숭)은 중국 晉(진)나라 갑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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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을 만나 오래 살고 싶어도, 하루하루 연명한다는 고된 삶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람의 삶과 죽음(死生)은 모두 천명에 달려 있다(有命)는 성어가 그것을 말한다. ‘論語(논어)’ 顔淵(안연) 편에 孔子(공자)의 제자 司馬牛(사마우)가 난리를 일으키려는 형 때문에 근심하며 자신에게는 형제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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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門十哲(공문십철)에 드는 제자 子夏(자하)가 위로한다. ‘죽음과 삶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死生有命 富貴在天/ 사생유명 부귀재천)’는 말이 있으니 모든 사람과 더불어 예를 지키면 모두가 형제라고 말한다. 여기서 四海兄弟(사해형제)란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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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는 諸葛亮(제갈량)이 침식을 잊을 정도로 나라를 위해 食少事煩(식소사번)하여 건강을 잃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나온다. 장막 안에서 등을 켜 놓고 기도를 올릴 때 부하가 들어 와 보고하면서 등을 꺼뜨렸다. 孔明(공명)이 탄식하며 말한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렸는데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死生有命 不可得而禳也/ 사생유명 불가득이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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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에서도 다수 검색되는데 조선 후기 李瀷(이익, 瀷은 강이름 익)의 樂府詩(악부시) ‘碓樂(대악, 碓는 방아 대)’ 하나만 보자. ‘대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 있고 부유하고 귀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夫死生有命 富貴在天/ 부사생유명 부귀재천), 그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그 가는 것을 좇아갈 수 없다(其來也不可拒 其往也不可追/ 기래야불가거 기왕야불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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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서산에 지고도 다음 날 떠오르고 가을에 시든 풀은 봄에 다시 나는데, 인생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조선 문신 李鼎輔(이정보)는 시조로 탄식한다. 공자도 제자가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고 말한다. 이처럼 성인도 알 수 없는 죽음은 하늘만이 알아서 人命在天(인명재천)이라 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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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믿음이 깊은 사람은 ‘죽기 살기는 시왕전에 매였다’는 말을 하니 그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매한 보통사람들이 人命在車(인명재차), 人命在妻(인명재처)라고 하는 것을 보면 현명하게 목숨을 잘 지켜야 함은 아는 모양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