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용무處容舞에 빠진 연산군
■ 처용무(處容舞)에 빠진 연산군
연산군은 음악과 춤을 좋아했다. 악기 중에서는 특히 호가(胡茄)를 좋아했다. 호가는 북방 유목민들이 갈댓잎을 말아서 만든 악기로 풀피리와 비슷하다. 호가를 좋아한 연산군은 특별히 전국에서 풀피리를 잘 부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기도 하고, 최고의 호가 연주자인 귀손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연산군은 특히 처용무를 즐겼다.(신라 설화인 《처용설화》에서 비롯하여 처용가면을 쓰고 추는 춤.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는 원래 악귀를 쫓는 놀이였다. 연산군은 처용 탈에 금·은·주옥같은 보석들을 장식해 화려하고 풍성하게 만들고는 그것을 ‘풍두(豊頭)’라고 불렀다. 궁중에서는 연말연시에 악귀를 물리치거나 만복을 기원하기 위해 처용무를 공연했고, 처용무는 흥겨운 축제의 마당이었다. 처용무의 마지막 마당에선 처용들이 너울너울 어지럽게 춤을 추며 빠른 곡조와 격렬한 율동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연산군은 처용무를 거창하게 공연하기 위해 ‘흥청’이라고 하는 수천 명의 여성예술단과 ‘광희’라고 하는 1000명의 남성예술단을 조직했다. 처용무에서 가장 중요한 춤 동작은 팔을 꺾으며 옷소매를 휘두르는 동작인데, 이 핵심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통일시키기 위해 연산군은 당시 최고의 처용무 춤꾼으로 이름 높았던 여산을 초빙해 춤 선생님으로 삼았고, 자기 자신도 여산에게서 처용무를 배웠다. 이렇게 처용무의 춤사위 하나하나까지 눈여겨보고 그것을 통일시키려 한 연산군은 매우 날카로운 광기에 가까운 예술 감각을 소유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불교를 혐오한 연산군은 처용무의 마지막 마당에서 합창되던 ‘영산회상불보살’ ‘나무아미타불’ 등의 불교 가사를 개작(改作)함으로써 처용무를 전혀 다른 형태로 탈바꿈시켰다. 처용무에서 불교 색채를 빼고 나면 무속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한밤중에 직접 처용 탈을 쓰고 광기어린 춤을 추는 일이 잦아졌다. 죽은 자의 말을 하고 죽은 자의 모습을 표현했는데, 마지막에는 죽은 자의 우는 모습을 흉내 내기도 했다.
당시 연산군이 처용무를 추며 불러낸 죽은 자는 다름 아니라 폐비 윤씨, 즉 연산군의 생모였다. 폐비 윤씨의 원혼이 연산군에게 빙의되어 원통한 사연을 처용무를 통해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산군에게 처용무는 즐거운 예술이 아니라 원귀의 굿판이었고 원한의 통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처용가면 뒤에 숨은 연산군의 실제 모습은 통한과 서러움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외로움과 처절한 복수심으로 몸부림치는 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