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조 히데키와 ‘삼간사우’
◇ 도조 히데키와 ‘삼간사우’
1944년 2월, 총리 겸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는 불리한 전황(戰況) 타개를 이유로 참모총장을 겸직한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군 수뇌부의 무능과 현실 감각 결여에 대한 불만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도조가 행정권, 군정권에 이어 군령권까지 손에 쥐자 육군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고조되고, ‘삼간사우(三奸四愚)’라는 소문이 나돈다. 삼간사우란 세 명의 간신과 네 명의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의미로, 도조가 중용하고 의지하던 측근들을 말한다.
그중의 한 명으로 지목되는 사토 겐료(佐藤賢了)는 육군성 최요직인 군무국장을 맡아 도조의 권력 유지와 정책 결정에 핵심 역할을 한 최측근이다. 그는 자기 신념이 강한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군무과장 시절 국회 ‘국가총동원법안 위원회’에서 법안 설명을 하던 도중 자신에게 야유하는 의원에게 “닥쳐”라고 일갈하여 물의를 빚은 사건은 그의 인물됨을 보여준다. 반대파에 대한 감시와 동갈(恫喝)을 일삼으며 의회민주주의를 마비시킨 도조의 ‘헌병 정치’를 지근 거리에서 보좌한 인물이 그였다.
초급 장교 시절 미국에서 유학한 사토는 주변에서 미국 전문가로 통했다. 문제는 그의 미국 인식이 부정확을 넘어 부정직했다는 것이다. 강경 대미(對美) 개전파였던 그는 전세가 역전되던 1943년 시점에도 국회에 출석하여 ‘미군 장교들은 전략 전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유치한 수준’이라고 태연하게 발언하는 등 자신의 오판을 숨기고 세간의 인식을 오도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저명 사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사토를 두고 “이 엉터리 미국통은 미국에 무지한 사람보다도 (나라에) 더 큰 해악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리더에게는 충성스러운 측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문가가 필요한 자리에는 충성심이 아니라 전문성이 용인(用人)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자기 주변을 돌아보고 삼간사우를 경계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일 것이다.
-조선일보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