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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수요일

◇ 북에선 교수, 남에선 일용직… 엘리트 탈북민을 ‘걸림돌’ 취급, 서글픈 탈북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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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고위직·전문직을 지낸 탈북민들이 정부의 무관심 속에 자리를 못 잡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정부는 엘리트 탈북민이 북한에서의 경력을 활용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맞춤형 관리를 했다. 하지만 현 정부는 북한을 지나치게 의식해 엘리트 탈북민들을 사실상 방치한다는 지적이다. 탈북민 사회에선 “정부가 탈북자들을 ‘먼저 온 통일’이 아니라 ‘남북 관계 걸림돌’ 취급을 한다”는 말이 나온다.

현 정부 출범 후 귀순한 조성길 이탈리아 주재 대리대사, 류현우 쿠웨이트 주재 대리대사 등 고위급 외교관들은 이렇다 할 직업이 없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류씨와 같이 정보 활용 가치가 있는 고위급·핵심 탈북 인사들을 국정원 내부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전략연) 등에 근무를 주선해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다. 이들의 경험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류씨의 경우 한국에선 별다른 역할 없이 대학원을 다닌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정보 당국이나 정부 쪽에서 별다른 요청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전혀 없었다”고 했다.

2019년 탈북해 경기도에 정착한 김영국(가명)씨는 한 물류센터에서 상품 포장과 입·출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는 북한 도(道)검찰소 검사 출신이다. 북에서도 검사는 선망받는 엘리트 직업이다. 학력, 집안, 군 경력이 모두 뒷받침돼야 한다. 그는 검찰에서 국토 환경, 부동산 분야를 담당했다. 친척 문제로 불이익을 당해 탈북했다는 김씨는 한국에서도 경력을 살려 일하기를 기대했지만 지난해 5월 하나원을 나온 뒤 아직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닥치는 대로 구직 활동을 했지만 50대 탈북민을 쓰겠다는 회사는 없었다. 지금의 아르바이트 자리도 지인 소개로 겨우 얻었다.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특혜 같은 걸 바라진 않았다. 다만 한국에서도 어디선가는 북한 법률과 관련한 내 전문성을 필요로 할 줄 알았다”며 “지금은 앞날에 대한 막막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잠도 안 온다”고 했다.

과거 정부는 고위급 탈북민을 국정원의 싱크탱크 격인 전략연에 채용해 이들의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서 전략연은 탈북민 출신을 채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함께 귀순한 김덕홍 전 당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은 지난 연말 전략연 고문 자리에서 해촉됐고 자문비 명목으로 받던 생계비마저 끊겼다. 김씨는 지인들에게 “먹고살 길도 막막하고, 신변의 위험도 느낀다”고 호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2018년 김정은 비자금을 관리하던 노동당 39호실 지사장 출신 탈북민이 생활고를 못 견디고 2년도 안 돼 해외로 떠났다”고 했다.

북한에서 대학 교원(교수)으로 재직하다 2017년 4월 탈북한 최하동(사진)씨는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부품 조립을 한다. 북에서 라디오로 한국 방송을 들었다는 그는 “남조선에 가서 통일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탈북했는데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고 했다. 그는 “북에서처럼 대우받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먹고사는 자체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는 건강이 상해 요즘엔 일주일에 한두 번 공사장에 나간다. 그마저도 일감이 없어 허탕을 치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부턴 ‘이제는 말하련다’라는 제목의 유튜브 방송도 시작했다. 북한 실상을 알리고 북한 주민들을 계몽하겠다는 취지지만 최씨는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고위급 탈북민이 어떻게 정착하느냐는 개인의 행복·안전 차원을 넘어 김정은 정권의 폭정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는 엘리트 탈북민들을 보며 북한 주민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희망을 갖게 되고, 결국 통일을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독일에서도 냉전 시절 서독으로 탈출해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동독 출신들이 통일에 큰 역할을 했다. 고위급 탈북민 B씨는 “지금처럼 엘리트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고생한다는 소식만 들린다면 북한 정권이 ‘조국을 배신한 자들의 비참한 말로’라고 선전하지 않겠냐”고 했다.

정부는 엘리트 탈북민 홀대 지적에 관련 예산을 줄이지 않았고 처우도 변함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정부가 탈북민을 보는 시각은 확연히 달라졌다. 작년 북한이 탈북민 단체의 전단 살포를 비난하자 통일부는 탈북민 단체 2곳에 대해 법인 설립 허가를 취소하고 탈북·인권단체들에 대해 사무검사를 진행했다.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인권침해이자 정치적 탄압”이라고 발끈했다. 정부·여당은 ‘김여정 하명법’이란 야당의 비난 속에 ‘대북전단 금지법’도 강행처리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