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딸들 옹알이, 이제 폰으로 볼 수 있어요
◇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딸들 옹알이, 이제 폰으로 볼 수 있어요
서울 중랑구에 사는 장경순(63)씨는 이달 초 장롱에서 30년 묵은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1989년 자신의 결혼식 때 촬영한 영상 테이프였다. 반가운 마음에 틀어보고 싶었지만 집에 VCR(비디오테이프 재생기)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장씨는 지난 9일 한 영상업체를 찾아 이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했고 최근 아내, 세 자녀와 나란히 앉아 영상을 봤다. 스물다섯인 막내딸은 부모님의 결혼식 영상을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도 올렸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김윤경(47)씨도 작년 12월 구청 산하 문화원을 통해 비디오테이프 8개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했다. 김씨는 “두 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영상을 함께 보면 사춘기 때문에 말수가 줄어든 고2, 중3인 딸과 대화를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신청했다”고 했다. 영상에는 옹알이하는 첫째가 갓 태어난 둘째를 돌보는 모습, 딸이 아빠에게 뽀뽀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김씨는 “영상을 함께 보고 나서 대화가 더 많아졌다”고 했다.
집 안 곳곳에 ‘유물(遺物)’처럼 보관해 온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과거의 추억이 담긴 테이프를 찾아내더라도 VCR이 사실상 사라져 이를 재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이런 수요를 파악한 지자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코로나 확산 이전 서울시 지자체 중 디지털 영상 변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강서구 한 곳이었다. 최근엔 동대문·성동·송파·양천구 등 5곳으로 늘었다. 구청이나 산하 문화원에서 5000원 안팎의 비용을 받고 변환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 동작구·성북구도 올 상반기 중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양천구 관계자는 “작년 9월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는 377건의 변환 요청이 들어왔는데, 12월에는 929건으로 거의 3배가 됐다”고 했다. 작년 11월 서비스를 시작한 성동구는 ‘한 달에 10명쯤 오겠거니’ 했다가 300명이 몰리자, 부랴부랴 변환 장비를 기존 3대에서 5대로 늘렸다.
서울 송파구의 영상 변환 업체 스마트메모리즈 관계자는 “작년 12월 한 달에 들어온 의뢰 접수만 2700여 건으로 1년 전보다 1000건 가까이 늘었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과거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다시금 느끼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라며 “제약이 많은 현실 대신 과거의 영상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는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