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대통령은 착한 임금님
◇ 우리 대통령은 착한 임금님
4년 전 촛불을 들었을 때를 돌아보자. 오늘 무엇이 바뀌었나? 대통령과 장관들, 국회의원들의 면면 말고? 이젠 재벌개혁이란 말조차 나오지 않게 되었고, 교육개혁은 이미 포기한 듯 관심 바깥의 일이 된 지 오래다. 부동산 문제는 악화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프레카리아트’가 되는 일방통행의 길만 있을 뿐이다.
학교나 공직에서 은퇴한 분들한테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그 자리에 있었을 때 더 충실히 보냈어야 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리인지 물러난 뒤에야 알았다.” 교직이나 일반 공직이 그렇다면, 대통령의 자리는 엄중하고 또 엄중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수반이면서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기자회견이나 국정브리핑을 통해 각 분야의 정책 방향, 그 실행과 검증 과정을 밝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면서 국민을 이끌고 가야 한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닮았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 )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을 하겠습니다. (…)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취임사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예감하며 감동했다. 하지만 신기루였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가 경호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금세 ‘없던 일’이 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국민과 열심히 소통하겠다는 약속이 가뭇없이 사라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설명이든 해명이든 듣지 못했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의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를 합친 횟수는 김대중 150회, 노무현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문재인 6회다. 위정자로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는 자리는 불편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자리는 불편하지 않다. 임금님은 불편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팽목항에 가야 했던 것도 임금님이 아니라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질문, 불편한 자리를 피한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은 대통령보다 임금님에 가깝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으로 백성한테서 ‘상소문’을 받는다는 점도 그렇다. 임금님인데, 착한 임금님이다. 여느 임금님과 다른 것은 군림 기간이 5년으로 정해져 있어서 이제 1년 반도 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보내는 임금님이 아니라 불편하게 보내는 대통령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감히 말하건대, ‘성공한 대통령’의 길이 거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불편한 자리, 불편한 질문을 피하면서 임금님처럼 처신하는 방식은 비슷한 구도를 갖는다. 먼저 대통령으로 선의의 약속이 행해진다. 약속하는 자리는 불편하지 않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불편함이 따르는데 그때부터 질문도 피하고 자리도 피하는 임금님이 된다. 대통령으로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면서 진상규명을 약속하고, 김용균씨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김용균법을 약속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지지부진하고 ‘김용균이 적용되지 않는 김용균법’이 제정된다. 그때부터 질문도 받지 않고 불편한 자리도 찾지 않는 임금님이 되는 식이다.
1년 전이면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국민과의 대화’에서 “전국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히려 하락했을 정도로 안정화되고 있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고 자신감을 피력했을 때는 대통령이지만, 오늘 전혀 다른 결과 앞에서는 질문을 받지 않는 임금님이 된다.
당 대표 시절 지자체장의 잘못으로 선거를 다시 하게 될 때엔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또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지만, 서울특별시장·부산광역시장의 미투 문제와 부닥치면 임금님이 되어 침묵한다. 집권 민주당이 제1야당과 똑같이 위성정당 방식으로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면서 민주주의에 흠집을 냈을 때에도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국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사회 현안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침묵으로 일관한다. 과문의 탓인지 낙태 합법화에 대한 문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후보 시절 지지자들의 “나중에!” 연호 속에 피해갔는데 성소수자에 관해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었는지 듣지 못했다.
동성결혼권을 처음 합법화한 나라는 2001년의 네덜란드였는데, 미국에서 2015년 연방대법원 판결에 따라 동성결혼권이 인정된 후 독일도 2017년에 동성결혼권을 합법화했다. 프랑스에서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 법안을 주도했다면, 독일에서는 보수적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주도했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독일 헌법 조문을 들어 반대표를 던졌는데, 법안 상정에는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국정 최고지도자들의 모습이 그랬다. 국민 사이에 의견이 분열되어 있는 사회 현안도 피하는 대신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토론, 설득하고 추진, 돌파한다. 우리는 동성결혼권은커녕 생활동반자법도 없는 형편인데, ‘시대의 기후’를 앞서 읽고 자신 있게 소신을 밝히는 정치지도자는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국가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불온한 시선을 갖고 있어서겠지만, 상이나 훈장 중에는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을 위한 경우도 많다. 전태일 열사에게 훈장을 주는 자리라면, 적어도 그 이름을 딴 ‘전태일3법’에 관심을 표명하고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게 대통령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여길 만큼 임금님이 되어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도 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 기소불욕물시어인)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불편함이 싫은 임금님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임금님이 두어번 진노하셨을 뿐이니, 참모들도 장관들도 불편하지 않다. 참모, 장관이 불편하지 않으니 관료들도 불편하지 않고 국회의원들도 불편하지 않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에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공방, 국회에서 벌어지는 저급한 공방들은 인민의 삶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가려주는 스펙터클이다.
4년 전 촛불을 들었을 때를 돌아보자. 오늘 무엇이 바뀌었나? 대통령과 장관들, 국회의원들의 면면 말고? 이젠 재벌개혁이란 말조차 나오지 않게 되었고, 교육개혁은 이미 포기한 듯 관심 바깥의 일이 된 지 오래다. 부동산 문제는 악화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란 뜻의 이탈리아 조어)가 되는 일방통행의 길만 있을 뿐이다. 그 위에 코비드19가 덮쳤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글이 신민들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하리라는 것을. 집중포화를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착한 임금님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여 대통령의 자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면 그것으로 이 서생은 기쁠 것이다.
"-한겨레 홍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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