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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일요일

❤ 공민왕의 개혁 1편

❤ 공민왕의 개혁 1편

❤ 공민왕의 개혁 1편

공민왕은 우여곡절 끝에 22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원 간섭기가 아니었다면 공민왕의 즉위는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친형에 이어 친형의 아들 두 명이 왕위를 차지하고 나서 겨우 그 뒤를 이어 다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우리 역사상 공민왕이 유일무이하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공민왕 역시 아버지와 형이 원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다. 공민왕은 연경에 머물던 10년 동안 원나라가 내 · 외의 끊임없는 반란으로 국력이 쇠퇴해 가고 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은 원의 국력도 홍건적의 난 이후 거의 힘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왕이 된 공민왕은 본격적인 개혁을 시도한다. 특히 신돈을 등용해 행했던 개혁은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만큼 혁신적인 것이었다. 만약 신돈의 개혁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조선 건국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는 크게 변했을 것이다. 공민왕은 즉위와 동시에 원나라가 강요한 변발(辮髮)을 풀어 헤치고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쳤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은 의외로 원나라 공주 출신인 부인 노국대장공주가 전폭 지지해 줌으로써 힘을 실어 주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황후의 친오빠인 기철과 권겸, 노정 등의 친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했다. 그 해 원의 연호와 관제 및 정동행성(내정간섭)을 폐지하고, 원나라가 빼앗아가서 백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철령 이북의 땅)에 대한 공격을 유인우에게 명했다.

쌍성총관부에 대한 공격은 공민왕 반원개혁의 상징적 사건이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쌍성총관부에서 대대로 원의 작위를 세습하고 있던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원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성계가 스무 살이 되던 해로, 이것을 계기로 이성계는 고려정계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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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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