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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일요일

가갸날

■ 가갸날

■ 가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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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침략 야욕을 본격화했던 1907년, 주시경선생은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 안에 있던 청년학원에서 국어강습소를 열었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심어주겠다는 취지였다. 주시경선생은 청년학원뿐 아니라 이화, 숙명, 진명, 보성, 배재, 경신 등 20여 개의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우리 역사와 지리 등을 강의하며 젊은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웠고, 국어 문법에 대한 책을 펴냈다. 또한, 1908년 8월 31일 돈의문 밖 봉원사에서 30여 명의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국어 연구에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아 우리말 연구를 위한 ‘국어연구학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조선어연구회’의 모체가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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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면서 국어 연구는 더욱 어려워졌다.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을 거쳐 한글배곧(한글을 배우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꿨고, ‘국어연구학회’는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13년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면서 우리말을 뜻하는 한글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국어라는 말이 더 이상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뜻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글 또는 큰 글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한글이라는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주시경선생이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한글은 기존에 쓰이던 언문이란 말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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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큰 기둥이었던 주시경선생이 안타깝게도 1914년 38세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한글모 활동도 1917년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해야 한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21년 주시경선생의 제자인 임경재, 최두선, 장지영 등이 중심이 되어 한글모를 계승하는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날의 한글날이 된 ‘가갸날’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조선왕조실록에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됐다는 기록이 있어,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양력 11월4일)을 가갸날로 정했고,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글날을 오늘날같이 양력 10월 9일로 확정한 것은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이다.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9월 상한(上澣)에 정인지가 썼다’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이다. ‘9월 상한’을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인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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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에는 현대 한글맞춤법의 뿌리가 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이후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의 연구도 계속되었다.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일제는 1942년 한글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위반했다며 조선어학회 학자 33명을 체포 및 투옥했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1945년 광복이 찾아오면서 많은 학자가 무사히 풀려났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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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가갸날

■ 가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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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침략 야욕을 본격화했던 1907년, 주시경선생은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 안에 있던 청년학원에서 국어강습소를 열었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심어주겠다는 취지였다. 주시경선생은 청년학원뿐 아니라 이화, 숙명, 진명, 보성, 배재, 경신 등 20여 개의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우리 역사와 지리 등을 강의하며 젊은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웠고, 국어 문법에 대한 책을 펴냈다. 또한, 1908년 8월 31일 돈의문 밖 봉원사에서 30여 명의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국어 연구에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아 우리말 연구를 위한 ‘국어연구학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조선어연구회’의 모체가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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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면서 국어 연구는 더욱 어려워졌다.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을 거쳐 한글배곧(한글을 배우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꿨고, ‘국어연구학회’는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13년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면서 우리말을 뜻하는 한글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국어라는 말이 더 이상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뜻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글 또는 큰 글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한글이라는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주시경선생이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한글은 기존에 쓰이던 언문이란 말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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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큰 기둥이었던 주시경선생이 안타깝게도 1914년 38세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한글모 활동도 1917년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해야 한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21년 주시경선생의 제자인 임경재, 최두선, 장지영 등이 중심이 되어 한글모를 계승하는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날의 한글날이 된 ‘가갸날’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조선왕조실록에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됐다는 기록이 있어,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양력 11월4일)을 가갸날로 정했고,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글날을 오늘날같이 양력 10월 9일로 확정한 것은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이다.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9월 상한(上澣)에 정인지가 썼다’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이다. ‘9월 상한’을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인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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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에는 현대 한글맞춤법의 뿌리가 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이후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의 연구도 계속되었다.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일제는 1942년 한글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위반했다며 조선어학회 학자 33명을 체포 및 투옥했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1945년 광복이 찾아오면서 많은 학자가 무사히 풀려났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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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