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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간신 유자광 2편

■ 간신 유자광 2편

■ 간신 유자광 2편

유자광에 관한 여러 가지 야담(野談)이 전해지고 있다. 중종 때 사림 출신이면서도 기묘사화를 일으켜 간신으로 지탄받은 남곤은 《유자광전》을 통해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유자광은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처럼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는데, 도박을 좋아하고 여자를 강간하는 등 매우 광패해서 유규가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조 대의 문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유자광이 어린 시절 매우 영특하여 천출임에도 불구하고 유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무튼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유자광은 좋은 머리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고,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출세한 인물이다. 유자광은 당시 사회에 순응해 가면서 서얼차대법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 뿐 이었다. 왕실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공신이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역모를 고변하여 사전에 진압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아예 역모를 성공시켜 새로운 왕을 만들어 내는 것 뿐 이었다.

유자광은 평생 관직에 임명되거나 승진하려할 때마다 대간(감찰 임무를 맡은 대관(臺官)과 국왕에 대한 간언을 맡은 간관(諫官)의 합칭:사헌부, 사간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반대의 근거는 항상 그가 서얼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실제 관직에는 거의 임명되지 못한 특이한 경력을 남겼다. 그에 관한 기록에는 ‘무령군(武靈君)’이나 ‘무령부원군’이라는 명예직으로만 기록되어있다.

유자광의 첫 직업은 갑사(甲士)였다. ‘으뜸가는 군사’라는 그 의미대로 갑사는 국왕 호위와 수도 경비를 맡는 정예병이었다. 그런 임무 상 그들은 뛰어난 무예를 갖춰야 했으며, 의장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용모와 체격도 뛰어났다. 그들은 정규 무관은 아니지만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았고, 교대로 지방에 내려가 복무하기도 했다.

유자광이 출세하게 된 첫 계기는 세조13년(1467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 이다. 그때 그는 28세의 갑사로 남원으로 내려가 복무하고 있었다.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유자광은 즉시 도성으로 올라와 상소를 올렸다. 그때 전황은 관군이 상당히 고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갑사에 소속된 뒤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한번 죽으려고 했다”고 하며, “함길도가 험하지만 그런 조건은 적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면서 과감한 결전을 주장했다.

세조는 유자광의 글을 보고 경탄했다. 유자광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자광의 활약 덕분이었는지 ‘이시애 난’은 석 달 만에 진압되었고, 세조는 유자광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서얼이라는 신분의 벽을 넘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병조정랑(정5품)에 임명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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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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