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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간신 유자광 3편

■ 간신 유자광 3편

■ 간신 유자광 3편

조정 대신들의 반발에 부닥친 유자광은 병든 모친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갔는데, 세조는 그에게 약을 내려주고 휴가와 역마를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8년(세조14년)에 세조는 세자와 함께 온양(溫陽)으로 행차할 때 그를 다시 불러들여 총통장(總筒將)으로 임명해 자신을 호위케 하였다. 그리고 유자광을 온양에서 실시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케 하여 장원으로 선발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임명하였다. 말 그대로 파격적인 지시였다.(세조14년 2월15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유자광은 신숙주(申叔舟)가 선발한 합격자의 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세조가 직접 그의 글을 1등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세조에게 발탁된 지 8개월 만에 갑사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이때 그는 29세였다.

그러나 고속승진은 했지만 공신까지는 되지 못했다. 유자광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지만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도 되고 병조판서 자리까지 오른다. 유자광은 그런 남이를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남이를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학문과 무예 양쪽에서 모두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얼출신인 유자광이 당시 조선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아야만 했고, 야비하고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고 해야만 했다.

유자광의 첫 번째 작업은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강순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남이역모사건)해 그들을 제거한 일이었다. 남이가 한명회·김국광 등을 죽이고 임금을 바꾸려 한다고 고했고, 가혹한 심문을 거쳐 남이를 비롯해 강순(康純)·조경치(曺敬治)·변영수(卞永壽) 등이 처형되었다. 유자광은 당연히 크게 포상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책봉되었던 적개공신(敵愾功臣)에서 2등으로 추록(追錄)되고, ‘남이의 옥사’로 익대(翊戴)공신에 책봉되고 ‘무령군’에 녹훈(錄勳)되었다. 공신 명단의 맨 앞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것은 이 사건에서 세운 그의 공로에 대한 평가를 증명해 준다. 이제 유자광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유자광은 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공신이 되었다.

이때부터 성종8년(1477년)까지 그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면서 조정의 여러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했다. 성종7년 한명회가 정희대비(貞熹大妃)의 수렴청정 중단을 반대하자 즉각 이에 반대하고 오히려 한명회를 탄핵한 것은 유자광의 견고한 지위와 정치적 판단을 보여준다. 그는 이듬해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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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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