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유자광 4편
■ 간신 유자광 4편
순탄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발단은 성종8년 7월 ‘무술옥사(戊戌獄事)’로도 불리는 간통사건을 놓고 승지들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시작되었다. 현석규는 ‘강간’으로 결론지은 의금부의 판결에 찬성했지만, 임사홍을 비롯한 그 밖의 승지들은 거기에 반대했다. 일단 결론은 현석규와 의금부의 판단이 옳다는 쪽으로 내려졌다. 그러나 현석규가 다른 승지들과의 논쟁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이 제기되면서 문제는 확대되었다.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 이 사건에서 유자광은 문제를 촉발시킨 현석규를 계속 승진시킨 성종의 조치에 반대하다가 이듬해 5월 결국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직첩을 돌려받을 때까지 침체의 시간을 보냈다.
유자광은 성종16년(1485년) 5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어 7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도 품계는 높았지만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제 그는 46세의 장년이었다. 성종 후반에는 두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러나 이때도 한성부 판윤(성종18년 6월)과 황해도 관찰사(성종22년 12월)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었다.
1494년에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유자광은 55세였다. 유자광은 연산군 치세 12년도 무사히 넘겼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입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 중요한 계기는 연산군4년(1498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김일손의 사초(史草)에 기록된 김종직의 <조의제문> 속의 숨은 뜻을 밝혀내, 직접 글귀마다 주석을 달아 해석하여(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비방하고 있다고 해석함) 연산군이 알기 쉽게 했고, 사화로 확대되어 많은 사림파들이 숙청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걷어다가 빈청 앞뜰에서 불사르기도 했다. 나아가 1498년에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사초와 관련지어 모조리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연산군은 “유자광은 실로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로 특별히 칭찬하고, 죄인들을 국문(鞫問)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유자광은 조정에서 권력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를 간신이자 악인으로 규정하게 만든 결정적 오명도 이 무오사화를 계기로 씌워졌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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