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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간신 유자광 5편

■ 간신 유자광 5편

■ 간신 유자광 5편

수많은 폭정을 자행하던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反正:나쁜 왕을 쫓아냄)으로 쫓겨났다. 유자광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또한 적극 가담했다. 그는 궁궐 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고, 그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중종1년). 그러나 지금까지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여전히 실직(實職)에는 임용되지 못했다. 얼마 뒤 중종은 그의 품계를 ‘대광(大匡, 정1품)’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대간의 반대로 실패했다(중종2년). 이때 그는 68세였다. 유자광에게는 평생 이어진 참으로 집요한 대간의 반대이다.

유자광의 몰락은 곧 닥쳐왔다. 연산군 때의 두 사화(士禍)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대간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했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중종2년)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平海, 경북 울진)로 유배되고 공신에서도 삭훈되었으며, 자손들도 멀리 귀양 갔다. 야사에 따르면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갔다고 한다. 유자광은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그의 아들인 유방도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중종은 유자광이 죽은 뒤에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령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유자광은 1908년(순종1년)에야 죄명을 벗고 원래의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智略)과 용력(勇力)을 발휘하여 두 차례나 공신이 되면서 외면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림들과 대립하면서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간신으로 손가락질 받는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 그런 재능을 엉뚱하게 쓴 경우가 많다. 사회 현실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사대부들에게 유자광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조선의 역사는 조선사대부들이 쓴 역사인 만큼 유자광에 대한 왜곡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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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는 유자광이 당시 유명한 도적 홍길동을 무예로 제압해서 잡았다.라고 나온다. 홍길동은 실록(연산군)에도 나오는 전남 장성 출신의 실존인물이었다. 후에 허균에 의해 국문소설 ‘홍길동전’으로 다시 태어나 의적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도적 홍길동을 잡은 유자광은 역사상 둘도 없는 간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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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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