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이이첨 1편
■ 간신 이이첨 1편
이이첨은 무오사화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극돈의 5대손이다. 이극돈은 당시 훈구파의 거물로서 전례(典例)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행정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부임하는 곳마다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본관이 광주인 이극돈의 가문은 위로 3대, 아래로 5대까지 문과 급제자를 낸 조선의 명가(名家)였다. 그의 형제 네 명이 모두 정승과 판서를 지냈고, 조카와 사촌형제들도 참판과 참의를 지냈다.
이극돈은 1498년(연산군1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이 개설되었을 때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김일손이 수집한 사초(史草) 속에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 내용을 유자광에게 흘렸다. 유자광은 곧 연산군에게 김종직이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의 의제에 비견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미 사망한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 수많은 사림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 참혹한 무오사화의 서슬에 실록청의 수장이었던 이극돈은 어세겸, 유순, 윤효손 등의 사관들과 함께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결과를 따지고 보면 그 역시 피해자였지만 유자광에게 사화의 단초(緞綃)를 발설했다는 죄 때문에 두고두고 사림의 원망을 받아야 했다.
이극돈은 사화(士禍)의 불꽃이 사그라진 뒤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해졌고,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얼마 후 사직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연산군은 광주 이씨 가문을 경계하였고, 임사홍이 폐비 윤씨 사건을 거론함으로써 일어난 갑자사화 때는 거의 멸문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이극돈의 조카 이세좌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공신들은 이극돈을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규정했다. 그 탓에 이이첨은 어린 시절부터 이극돈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늘 사림들의 외면과 홀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의 가정은 꽤 어려웠고 그의 아내는 배고픔에 실성해 벽지의 풀을 먹었다는 설도 있다. 오랫동안 음지(陰地)에서 학문에 몰두하며 기회를 엿보던 그는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정인홍의 문하(門下)에 들어갔고, 1582년(선조 15년) 소과에 급제하여 종9품 광릉(廣陵: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 참봉(參奉:능을 돌보는 벼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은 이이첨에게 몰락해가는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보잘것없는 광릉 참봉으로 대과 응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망치지 않고, 현지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우게 된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봉선사의 주지 삼행은 봉안(奉安)하고 있던 세조의 영정(影幀)을 봉선전에 묻어두었다.
얼마 후 절에 침입한 왜군이 그것을 발견하고 찢어버리려 하자, 삼행이 애걸하여 되찾은 다음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 그 후 서울에 주둔하던 왜군이 날마다 광릉 근처에 출몰하여 민가(民家)를 약탈하고 숲에 불을 지르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세조의 영정이 훼손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인근에 있던 광릉 참봉 이이첨은 이 소식을 듣고 군막을 떠나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봉선사에 도착했다. 이이첨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절에 잠입하여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던 삼행으로부터 세조의 영정을 받아들고 곧바로 적진을 뚫고 돌아왔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