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이이첨 3편
■ 간신 이이첨 3편
아침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조가 집무를 보다가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김상궁(김개시)과 함께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항간에 퍼진 것이다. 원배령을 받았던 이이첨이 유배를 떠나지 않고 이틀 동안 머뭇거리다 풀려난 것도 이런 소문을 뒷받침해 주었다. 선조는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연 승하하였다. 당시 유영경은 후사를 광해군에게 맡긴다는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으로 보위를 이은 다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창대군의 나이가 워낙 어린데다가 부왕(父王)의 유지(遺志)를 존중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대북파를 이끌던 정인홍과 함께 이이첨은 적극적으로 광해군을 지지하여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의 1인자로 국사(國事)를 좌지우지하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천거하고,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자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광해군은 남인 이원익을 정승으로 임명하여 초당파적인 정국을 운영하려 했지만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대북파의 저지로 인해 곧 뜻을 접고 만다.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한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를 역도로 몰아 모두 처형했다. 뒤이어 수시로 왕위에 집착을 보이던 임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한 다음 살해하기까지 했다. 광해군의 복심(腹心)을 미리 읽고 행동하는 심복이 된 것이다. 그는 권력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지만 항상 조정의 논의를 주도했으므로 벼슬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저택 앞에 줄을 섰고, 조정에서도 그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1609년(광해군 1년) 7월 경상도 유생 이전 등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제창했다. 문왕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 문묘에 조선 유림의 대표적인 선비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사람을 배향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묘종사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조정에서 불화가 일어났다. 당시 북인들은 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언적과 이황이 포함된 반면 자신들의 스승인 서경덕과 조식이 누락되었다며 반발했다. 1611년(광해군 3년) 정인홍이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의 그릇된 처신을 비판했다. 명종 즉위년에 벌어진 ‘양재역 벽서 사건’과 이듬해의 ‘정미옥사’로 사림이 떼죽음을 당할 때 두 사람이 조정에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은 유생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정인홍은 대북파의 영수로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고, 후계파동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인물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