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이이첨 6편
■ 간신 이이첨 6편
이이첨은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남다른 촉으로 빠르게 살아남는 길을 찾고, 그 안에서 자신이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실행에 옮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였다. 그저 그런 관리 중 한 명이었다가 "온 나라 사람들은 이첨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될 만큼 요즘으로 따지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던 이이첨에 대한 당대의 기록도 매우 냉정하다. 이이첨의 주도하에 대북이 작성한 <선조실록>의 내용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선조수정실록>을 간행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서인 집권 이후 이이첨이 지나치게 하향평가된 것을 보정하기 위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정치싸움의 행동대장으로 영입된 싸움꾼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이첨 등은 원수진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참형을 당하자 도성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시체가 온전한 데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인해 붙잡혀 아들들과 함께 참형을 당해 집안이 망했기 때문에 이이첨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인조반정이 연산군 때와 다른 점은 당시 권력을 휘두른 주동자 일부가 죽은 것에 그치지 않고, 실권당이었던 대북파 전체가 씨가 마르다시피 숙청당했다는 것이다. 서인의 이와 같은 피의 숙청으로 인해 북인은 물론이고 조식과 남명학파의 계보마저 사실상 끊겨버렸다.
하지만, 당대의 권력자였으며 반대 세력에게 철저하게 끌어내려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탐욕적이라는 평가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즉, 재평가 이후에도 권력밀착형 간신이라는 혹평을 받기는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꽤 청렴했다는 평가이다. 사택을 짓는데 선조 목릉의 나무를 쓰고 개간지를 일부 사유화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이 정도는 당대 웬만큼 실권이 있던 인물이면 흔히들 하던 일이었고, 특히 한명회, 김안로, 윤원형처럼 대놓고 부를 축척하던 인물에 비하면 시비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택(家宅:살고 있는 집)에는 사방에 책만 둘러져 있을 뿐 어떤 사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며, 심지어 평소에는 조촐하게 베옷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요즘에도 자주 스캔들이 터지는 여색 문제조차 전혀 시비거리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그의 당시 권세를 생각할 때 놀라울 만큼 청렴한 셈이다. 이것은 이이첨의 유일한 권력배경이었던 정인홍이 조식의 강건한 기풍을 계승해 꼬장꼬장하다는 평을 들었던 만큼 그의 후광을 받고 북인에 영입된 이이첨의 특수한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처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야사에서도 다른 권력자들과 다르게 사리사욕은 적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욕(物欲)과는 별개로 권력욕(權力慾)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이다. 든든한 배경이 될 만한 학맥도 없이 자수성가한 만큼 명예욕, 권력욕이 상당했던 권신이자 간신으로서 악명(惡名)이 높을 뿐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