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임사홍 4편
■ 간신 임사홍 4편
임사홍의 간교함은 자신의 아들마저 희생양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희재는 임사홍의 둘째아들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되었다.
祖舜宗堯自太平(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秦皇何事苦蒼生(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不知禍起所墻內(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虛築防胡萬里城(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이 시는 임희재가 쓴 것으로,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며 누가 쓴 것인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되었다. 혹자는 임희재가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讒訴)한 것이라고 하는 설(說)도 있다. 설마 아무리 간신배 임사홍이라 해도 자신의 아들 목숨까지 내버릴 수 있었을까.
여하튼, 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더욱 잔인한 사람으로 여겨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단맛은 아들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입맛에 맞는 최측근으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모아놓은 가무기생)과 흥청(興淸: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고 폭정(暴政)을 일삼던 연산군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최측근 임사홍 역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뒤 20여일 후 부관참시 당하고 가산(家産)을 몰수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또 다른 간신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임사홍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이라는 오명(汚名)과 낙인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