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3편
■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3편
이이명과 숙종의 독대이후 노론은 연로한 숙종 대신 세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공식적으로 주장한다. 당시 대리청정은 세자에겐 엄청난 시험대(試驗臺)가 되는 것이다. 대리청정(代理聽政) 중 큰 실책이 생기면 바로 세자는 쫓겨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를 연잉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한 노론의 음모일 수도 있다고 본다. 정유독대 시 숙종이 이러한 것을 묵인 해주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숙종도 세자에게 대리청정이 독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킨 것을 보면 숙종 또한 노론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추론이 가능하다.
어쨌든 노론의 목표는 숙종 생전에 세자를 폐위시키고 연잉군을 다시 세자로 옹립하는 것이었다. 노론들에게 세자의 대리청정은 꼬투리를 잡아 폐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은 당연히 대리청정에 반발했다. 80세 고령인 소론의 영수 윤지완은 궁궐로 달려가 거적을 깔고 대리청정을 거두라고 숙종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세자의 대리청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만약 숙종이 오래 살았다면 경종은 소현세자나 사도세자처럼 비운의 세자로 역사에 남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은 세자 경종은 흠잡을 데 없이 정국을 운영했다. 이미 노론에 포위된 사실을 감지하고 신중하게 행동한 덕분이다. 예상외로 대리청정을 큰 실수 없이 잘 해냈고, 숙종이 생각보다 빨리 죽는 바람에 결국 숙종 사후인 1720년 6월, 경종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1690년 3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오른 이래 30년 동안 힘겨운 세자 생활을 하면서 ‘최장기 세자’의 기록을 세웠다. 왕위에 오른 경종에게 노론의 위세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뒤에 정언이었던 이정소가 왕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다며 세자 책봉을 하라고 요구했다.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 돌발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下焦)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병약하고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하여 후사를 보지 못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실 경종은 35살 죽을 때까지 후사가 없었다.
『전하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후사를 두지 못하시니, 삼가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커다란 슬픔으로 애구(哀疚)하시는 중에도 반드시 근심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선왕께서도 반드시 정성스럽게 돌아보며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경종수정실록 2권》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