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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일요일

고려 충혜왕에 대한 진실 2편

■ 고려 충혜왕에 대한 진실 2편

■ 고려 충혜왕에 대한 진실 2편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충혜왕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한 원나라는 원나라 사신 6명을 고려에 보내 충혜왕에게 출영(나와서 맞이함)을 요구했다. 충혜왕은 이를 거부하다가 사신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정동행성(원이 설치한 내정간섭기관)에 나가 출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신들이 충혜왕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하고 포박해 버렸다. 충혜왕의 호위무장 두 명은 사신들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출영을 따라온 고려 신하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충혜왕은 그대로 말에 태워져 원으로 끌려갔다. 원의 황제는 대도(북경)로 끌려온 충혜왕을 ‘왕정’이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부르며 유배를 시켜버렸다. 충혜왕은 대도로부터 2만리 떨어진 게양현(지금의 광동성 조주 지방)으로 유배 가다가 죽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려 백성들은 자신들을 심하게 수탈하고 일생동안 오직 강간·여색·향락 등 수많은 악행을 일삼은 충혜왕의 납치를 환호했다고 나온다. 사실일까? 아무리 나쁜 왕이라고 할지라도 대낮에 원 사신들에게 폭행당하고 납치당한 것에 환호했을까? 물론 당시 원과 고려의 관계를 보면 원의 횡포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지만, 한 나라의 군주를 대낮에 폭행하고 마음대로 잡아다가 유배시킬 수 있었을까?

이 사건 뒤에는 원의 후궁으로 선발돼 들어갔다가 원 황제의 정부인이 된 기황후의 개인감정이 있었다는 설(說)도 있다. 충혜왕이 사소한 다툼으로 기황후의 다섯째 오빠인 기윤의 집을 허물어버리자 기황후가 직접 손을 썼다는 것이다.

"좋은 머리와 무예를 엉뚱한 데만 썼다. 그래서 안으로는 부왕(父王)에게 혼나고 위로는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었으니 객지에서 사망한 것도 자업자득이었다." 어떤 사관(史官)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충혜왕이 좋은 머리를 가졌고 무예가 출중했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충혜왕에 관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충혜왕은 즉위 초기에 새로운 정치를 실시하려 노력했지만, 원나라의 간섭과 친원세력의 횡포에 나라를 다스릴 자신이 없어져 그냥 자포자기로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막장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조선 건국의 정당성 부여라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고려사’에 충혜왕이 나쁘게 기록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역사의 치부가 과장·왜곡되면서 충혜왕은 더 한층 오명(汚名)을 쓰게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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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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