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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3일 토요일

곤이불학困而不學 - 곤란한 지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다.

곤이불학困而不學 - 곤란한 지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다.

곤이불학(困而不學) - 곤란한 지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다.

곤할 곤(口/4) 말이을 이(而/0) 아닐 불(一/3) 배울 학(子/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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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고 배우는 것에는 끝이 없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일에 통달하고 박학한 사람이라도 경험하지 않은 일까지 모두 알 수는 없다. 그래서 항상 배우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세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필히 본받을 스승이 있다고 孔子(공자)는 가르쳤다. 三人行 必有我師(삼인행 필유아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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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또한 배움의 태도에 따라 사람을 네 분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천하의 일을 다 아는 사람은 生而知之(생이지지)라 하여 生知(생지)가 가장 상등인데 성인이나 천재가 해당되니 아주 드물 수밖에 없다. ‘論語(논어)’의 季氏(계씨)편에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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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배워서 아는 學知(학지)이고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배우게 되는 困知(곤지)는 그래도 낫다. 문제는 곤궁함에 닥쳐서도(困而) 배우지 않는(不學) 사람이 가장 어리석다고 下愚(하우)라 했다. 성어가 나오는 부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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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란에 부딪혀서야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고, 곤궁한 지경에 있어도 배우지 않는 자는 최하이다(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곤이학지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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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인과 같은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은 소수라 제외하고 배워서 알거나 어려운 일에 닥쳐서라야 배웠을지라도 학습을 통해 배웠으니 선후가 달라도 결과는 같다. 공자와 문하의 문답을 포함하여 의례의 해설을 주로 담은 ’禮記(예기)‘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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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게 되며(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어떤 이는 곤경에 처해야 배워서 그것을 알게 되나 아는 것에 이르기는 모두 같다(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혹곤이지지 급기지지 일야).‘ 자발적으로 배우거나 억지로 배우게 되거나 알게 되면 곤경을 헤쳐 나가는 데엔 같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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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우는지 모르거나 누구에게 배울지 몰라 그런 수도 있겠지만 주변의 어디에나 묻는 것을 부끄러워 말아야 길이 보인다. 不恥下問(불치하문)이라 밭가는 일은 의당 종에게 묻는 耕當問奴(경당문노)나 공자가 아낙에게 구슬에 실 꿰는 법을 물었다는 孔子穿珠(공자천주)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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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닥치든 알바 아니라는 자포자기가 아니라면 明心寶鑑(명심보감)의 구절을 명심하자.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서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물위금일불학이유래일), 올해에 배우지 아니하고서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물위금년불학이유래년).’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