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원나라 지배기의 고려왕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원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해마다 많은 공물(貢物)을 바쳐야했다. 그러니 고려로 시집 온 원의 공주는 친정인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 남편인 고려왕을 업신여기기 일쑤였고, 원의 입장에서 사사건건 정치를 간섭하기도 하고 훼방 놓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대체로 왕과 왕비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달랐다. 비록 원에 의해 정략적으로 맺어진 부부였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지극했다.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은 12세부터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원나라 위왕의 딸 보타사리와 혼인을 맺게 되는데, 바로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여기서 ‘노국(魯國)’은 공자의 고향이기도 한 바로 그 노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시집갈 때 받은 땅의 이름을 따서 공주의 칭호를 정했다. 노국공주와의 정략결혼으로 원나라의 지지를 받은 공민왕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적극적인 반원 정책을 펴는 등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왕이다. 노국공주는 원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적극 지원해 주었고, 남편에게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다. 공민왕에게 불만을 품은 권문세족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도 보호해 주었고, 말을 못타는 공민왕에게 승마를 가르쳐 준 것도 그녀였다. 특히 김용이라는 신하가 왕을 죽이기 위해 벌인 ‘흥왕사의 변’ 때는 공민왕이 숨은 방 앞을 가로막고 반란군들을 물러가게 하기도 했다. 노국공주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잘 없었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방패가 되어주었다. 공민왕에게 있어 노국공주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가장 신뢰할 만한 정치적 동반자였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무척 금슬 좋은 부부였지만 안타깝게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한 나라의 국왕인 만큼 이 문제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하들과 공민왕의 어머니 공원왕후는 후궁을 들여 아이를 낳을 것을 제안했고, 노국공주는 하는 수 없이 허락을 했다. 결혼 10년 만에 혜비 이씨를 후궁으로 들였지만, 공민왕은 후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노국공주는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15년 만의 임신이었으니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공민왕은 부인의 순산을 하늘에 빌기 위해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풀어줬으며, 공주가 아이를 낳는 동안 위독해 졌을 때는 사형수들까지 모두 풀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국공주는 아이를 낳다가 난산(難産)으로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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