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3편
■ 광해 3편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일본군의 철수로 한양이 수복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했다. 때문에 조야(朝野)에서는 광해군이 차기 대권의 주인공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왜란 통에 어쩔 수 없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 선조는 1594년(선조 27년)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명나라에 세자책봉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광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던 명나라 조정이 선조에게 맏아들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막상 광해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면서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다섯 차례나 종용했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후계 다툼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제 신종은 정귀비에게서 얻은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장자(長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명나라 신료들은 만일 조선의 광해군를 세자로 승인해주면 신종이 주상락 대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선조는 명나라의 상황과 입장을 파악하고는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노력을 하지않고, 나아가 광해를 사실상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덧붙여 광해의 앞날에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났으니, 이는 선조의 새 장가였다. 선조는 첫째부인 의인왕후가 죽자 새 중전을 맞이했는데, 이 때 선조의 나이 51세, 새 중전 인목왕후의 나이 17세, 세자인 광해의 나이는 26세였다. 인목왕후가 적장자를 낳게 된다면 당연히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인목대비가 학수고대하던 첫 아이를 출산 하는 날, 선조와 광해군 양쪽의 희비가 엇갈렸다. 정명공주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조는 52세에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늦둥이 딸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조선시대 왕의 자식들은 6~7세가 되기 전까지는 호칭도 없이 그냥 아기씨라고 불렀다. 최소한 6~7세가 되어야 재산도 주고 왕자, 공주로 불리게 되는데 선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정명공주가 2살이 되자 4백만 평의 농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공주 앞으로 책정해 주었다. 이 재산이 천석정도 된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미성년자 주식부자나 다름없다. 3년이 더 지나 선조는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드디어 왕자를 보게 되었다. 정명공주의 친동생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다. 광해군의 고민은 깊어갔다. 명나라는 세자 인정을 거부하고 선조는 자신을 미워하는데, 설상가상 새어머니인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이때부터 선조(宣祖)의 마음은 광해군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