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4편
■ 광해 4편
이즈음 정권을 잡은 북인은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중 소북의 리더 영의정 유영경은 왕의 의중을 잘 읽고 그 뜻에 부합하는 능력이 출중하였다.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광해가 아니라 영창대군에게 있음을 알고, 세자를 바꿀 명분을 찾고 있었다. 당연히 명분은 ‘적자승계’이다. 선조가 영창대군이 좀 더 자랄 때 까지만 산다면 틀림없이 세자는 바뀔 것이라 생각하고 영창대군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선조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영경을 더욱 총애했고, 덕분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의 무리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후궁들과 상궁 나인들마저 광해군을 임시 세자로 여기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궁중의 안주인인 인목왕후라도 중심을 잡고 후궁 등을 단속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기는커녕 영창대군에게 세자 의상과 비슷한 옷을 입히기까지 하는 등 광해군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광해군은 이러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불안한 상태를 전쟁이후 무려 10년이나 견디어 냈으니, 그 속에 품은 한이 얼마나 컸을까.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선조 40년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여러 생각을 했으나 차마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비망기(備忘記:임금의 명을 승지에게 내려 전함)를 내려 장성한 광해군에게 전위(傳位) 또는 섭정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갑자기 선조가 몸져 누워 이 같은 뜻을 밝히자 급해진 것은 영창대군에 올인한 소북파의 유영경과 어머니 인목왕후였다. 인목왕후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으나, 유영경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선조의 뜻에 반대를 하였다. 반면에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는 유영경이 세자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충(不忠)을 저질렀다며 유영경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이렇게 대북파와 소북파들이 목숨을 건 대립을 하고 있던 이때, 다소 기력을 회복한 선조는 소북파 유영경의 손을 들어 주고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을 귀양 보내버렸다. 이로써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의 패배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선조(宣祖)는 재위 41년을 맞으면서 병세가 악화되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1608년 2월 향년 57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결국 선조(宣祖)가 죽자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