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5편
■ 광해 5편
선조(宣祖)의 죽음에 대해 북인(北人)이 기록한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왕비 인목대비가 지켰다고 했다. 그런데 서인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선조(宣祖)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未時)에 광해군이 찹쌀떡을 올렸는데 선조가 먹고 갑자기 기(氣)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입시(入侍)했던 선비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기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일컬어지듯이 이 역시 당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재위 장장 41년으로 초유의 임진왜란을 겪었고, 4색 당파의 분화(分化)와 당쟁을 지켜 본 선조. 권력유지에는 큰 수완을 보였으나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없이 그렇게 살다 갔다. 숱한 장애를 딛고 33세의 나이에 마침내 보위에 오른 광해군. 일찍이 왕재(王才)를 인정받았으나 16년의 세자 생활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하루 하루였다. 창업자인 태조에 견줄 만큼 나라 곳곳을 누볐고, 문종에 견줄 만큼 실무 경험이 풍부한 새 임금 광해를 백성과 신료들은 진심으로 반겼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등이 중심이 된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다. 대북 정권은 정적 제거의 칼을 빼들었다. 제일 먼저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히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 세력이었다. 유영경은 자신이 먼저 알아서 사직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은 선왕(先王)이 신임하던 재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북의 사주를 받은 대간의 탄핵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끈 공이 있음에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것, 세손의 원손 책봉과 혼인을 지연시킨 것,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 등을 이유로 유영경을 공격했다. 광해군은 결국 유영경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유배 보낸 후 죽였다. 유영경을 시작으로 소북의 여러 인사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남인인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서인인 이항복(李恒福)이 좌의정에 임명되는 등 조정에는 대북 외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가 뜻을 같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권의 실세는 대북에게 돌아갔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